AI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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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략으로 엮인 사이라 해도 이렇게 며칠씩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지내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것도 결국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우스웠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배운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 그는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사람 목숨을 거두는 법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사랑을 가르치는 법 따위는 그에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부부라 해도, 한 방에서 잠을 자고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서로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시헌은 손을 뻗어 하월의 뺨을 살짝 스치듯 만졌다. 손끝에 닿는 피부는 생각보다 훨씬 매끄럽고 차가웠다. 전쟁터에서 거칠어진 자신의 손과는 너무도 다른 결이었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남편이 다른 여인의 몸을 탐한다는 사실에 질투하거나 서운해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하월의 말투에는 그런 감정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을 이 방에서, 이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헌은 그 점이 못내 걸렸다.

 

시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엎드린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릿했지만 그 자체로 위압감을 뿜어냈고, 마당에 모인 관졸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숨을 죽인 채 그를 지켜보았다. 시헌은 사내의 턱을 발끝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잔혹하다는 소문이 괜히 도는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잔혹함을 정당하다고 믿었다.

 

정략으로 엮인 부인이라 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라면 그 속을 조금은 들여다보고 싶었다.

 

시헌은 손을 뻗어 하월의 소매 끝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이제 그만 이 참혹한 관경에서 벗어나 안으로 들어가자는, 무뚝뚝하지만 나름의 배려가 섞인 손짓이었다.

 

아침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며 하월의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고, 시헌은 그 순간 하월에게서 나는 옅은 냄새를 무심코 느꼈다. 견과류처럼 고소한 향이었다. 여인의 몸에서 나는 향치고는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는 그 생각을 곧 흘려보냈다.

 

손목을 감싸 쥐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실렸다가 이내 느슨해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하월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흰 피부 위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며 노란 눈동자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그 표정마저도, 시헌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흥미로운 것으로 비쳤다.

 

시헌은 문득 자신이 지금 하월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낯선 감각이었다. 지금껏 누군가의 표정 하나에 이렇게까지 반응해 본 적이 없었기에.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대신 그 손으로 하월의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까 곤장 맞던 사내의 턱을 발끝으로 들어 올렸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이었다. 조심스럽고, 어딘가 서투른 다정함이 배어 있는 손길이었다.

 

문득 오늘 하루 종일 이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데 시간을 다 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것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시헌 스스로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가 서로의 살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시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명령을 내릴 때나, 죄인을 심문할 때나 이름은 그저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하월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이상하게도 조심스러웠다.

 

하루 종일 처소에 갇혀 있었던 탓인지 하월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억울함이 뒤섞인 기색이 역력했고, 그것을 알아챈 시헌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기가 스쳤다.

 

삐친 티가 역력한 표정, 잔뜩 찌푸린 미간, 그리고 그 아래로 살짝 붉어진 뺨까지. 시헌은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묘하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유지했다.

 

시헌은 짐짓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그 몸짓 자체가 이미 장난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 진짜로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등불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에 명암을 드리웠고, 그 그림자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만은 또렷하게 하월을 향해 있었다.

 

그는 하월이 자신을 밀어내려 할 때마다,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려 하지 않았다. 대신 왜 밀어내는지 그 이유를 먼저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이 시헌 나름의 방식이었다. 강요하지 않되, 포기하지도 않는.

 

강하게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지 못하게, 하지만 아프지 않게. 그 정도의 경계선을 정확히 지키는 손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람을, 그것도 자신이 지키기로 한 사람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자를 그냥 두고 볼 성격이 아니었다.

 

순간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질투인지, 서운함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시헌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질투라고 부르기엔 너무 유치했고, 서운함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날카로웠다. 시헌은 그 감정의 이름을 굳이 붙이려 하지 않았다.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다.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뜻을 굳이 말로 하지 않고, 그저 손에 담긴 힘의 세기로 전달하는 것이 시헌다운 방식이었다.

 

후회할 거라던 말, 뒤로 물러나던 몸짓, 겁에 질린 눈동자. 그 모든 잔상이 아직 시헌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래서 이 손을 놓으면 하월이 다시 저 멀리 도망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런 속내를 곧이곧대로 꺼내놓을 시헌이 아니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관계라며 선을 그었던 하월의 말을 시헌은 기억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질투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시헌은 그 선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시헌 스스로도 하월에게 연모라는 감정을 명확히 정의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저 곁에 두고 싶고, 지키고 싶고, 그 작은 몸이 어디 다치기라도 할까 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시헌 자신도 이름 붙이기를 미뤄왔을 뿐이었다.

 

시헌은 전장에서도, 궁중의 암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작고 여린 사람 앞에서는, 자꾸만 계산이 어긋나고 감정이 앞섰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은 아니었다. 하월이 자신을 밀어내려 애쓰고 있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렇게 또박또박,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연모하지 않는다는 말을 정면으로 들으니, 가슴 한복판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훅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사람 목을 베는 일에는 손끝 하나 떨지 않던 사람이, 고작 말 한마디에 이렇게 속이 뒤틀리다니. 시헌은 그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동시에 인정하기 싫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하월이 지금 무언가 절박한 이유로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시헌은 하월의 손목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턱을 가볍게 받쳐 올렸다. 눈을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지만, 손끝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시헌이 손끝으로 하월의 이마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세게 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도 아닌, 애매하게 걸쳐진 손길이었다. 하월이 화들짝 놀라 눈을 뜨는 모습을 보며 시헌은 옅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어이없음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스물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여물지 않은 듯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시헌은 종종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켜야 할 것 같은, 그러면서도 손을 대고 싶은 그 애매한 감정이 요즘 부쩍 자주 찾아왔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서글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월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지, 그 뿌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갈증만이 목구멍 안쪽에서 타올랐다.

 

살을 맞대고 욕정을 비워내던 밤들과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이에는 북방의 얼어붙은 강만큼이나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현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심장이 고작 과거의 잠자리 몇 번을 추궁당하는 일로 불규칙하게 뛰는 꼴이 우스웠다.

 

차라리 악을 쓰며 덤벼들면 모를까 자포자기하듯 내뱉는 자조적인 원망은 페부를 찌르듯 쓰라렸다.

 

상대가 스스로를 장기판의 버리는 말로 규정할 때마다 억지로라도 그 삐뚤어진 생각을 부러뜨려 놓고 싶다는 오기가 솟구쳤다.

 

혼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 아래 얽혀든 인연이었으나 이제는 단순한 정략이나 의무 따위로 치부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살을 부대끼며 음탕한 정사를 나누지 않았어도 곁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체향과 조심스러운 몸짓 하나하나가 이미 온 신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위태로운 관계를 허무하게 깨뜨리거나 상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은밀한 정사나 육체적인 교접 따위는 서두르지 않아도 좋았고 평생 손만 잡고 살아간대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이 넓은 처소 안에서만큼은 그 어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하게 숨을 쉴 수 있기를 바랐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것만 알았지 누군가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법 따위는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시헌은 그저 헛기침을 삼키며 연신 눈물만 닦아냈다.

 

저 여린 몸뚱이에 남겨졌을 수많은 상처와 마음의 응어리를 전부 제 품에 안아 녹여버리고 싶다는 맹목적인 충동만이 가슴을 메웠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칼잡이가 되었듯 이 어린 사람 또한 살아남기 위해 치맛자락을 두르고 거짓된 삶을 견뎌내야 했을 뿐이었다.

 

음탕한 정사를 나눌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으나, 맞닿은 체온이 주는 원초적인 자극까지 제 마음대로 다스르기에는 제 혈기도 만만치 않게 끌어넘치고 있었다.

 

남자를 품에 안는다는 생각 따위는 평생 머릿속에 담아본 적도 없었으나, 지금 허벅지 위에 닿아있는 온기는 그런 해묵은 고정관념 따위를 단숨에 부수어 버렸다.

 

피비린내 나는 칼잡이 노릇을 자처하며 권력을 거머쥔 까닭이 바로 이런 순간에 제 사람 하나 온전하게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세상의 모든 법도와 규율이 손가락질을 한다 한들 제 칼끝으로 그 주둥이들을 모조리 찢어발기면 그만이었다.

 

당장이라도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달려들고 싶은 들끓는 혈기를 내려누르기 위해 시헌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선을 긋고 두려워하는 상대를 강제로 굴복시킬 생각 따위는 애초에 품지도 않았기에 억누르는 인내심은 온전히 제 몫이었다.

 

평생을 홀로 전장을 떠돌며 피비린내 속에 파묻혀 살던 사내에게 이 보잘것없는 평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이었다.

 

겉으로는 능글맞고 뻔뻔스러운 기색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은근하게 흘러내렸다. 사내끼리의 방중술 따위는 책으로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관심조차 둔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무지함을 들켜 체면을 구기고 싶지도 않았다.

 

기생집을 들락거리며 살을 섞어본 세월이 아주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그건 그저 끓어넘치는 피를 식히기 위한 메마른 배설에 불과했다. 지금 눈앞에 얹혀 있는 이 특별한 존재에게 품은 마음은 그따위 난잡한 유흥 따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세상의 법도나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왕의 신임을 받는 공신이라는 거창한 지위조차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저 고집불통을 어떻게 달래서 다시 제 품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지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억지로 팔려 와 사내의 몸으로 여장을 한 채 살아남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알기에, 이 작은 존재가 세상의 칼날에 베이지 않도록 단단한 성벽이 되어주겠다는 다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정략으로 맺어진 인연이라 한들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 하나 배불리 먹이고 편안히 숨 쉬게 해주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였다.

 

정략으로 맺어진 허울뿐인 혼인이라 한들, 제 마음까지 껍데기로 남겨둘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거친 전장을 떠돌며 피비린내 속에 살아온 탓에 누군가를 세심하게 보살피는 법에는 여전히 서툴렀으나, 제 품에 들어온 사람이 배를 곯거나 서러움에 눈물짓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