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잠시 롤플레잉 중단. 어느 날, 미인박명(=미인의 수명은 짧다는 뜻)이라는 사자성어를 접하게 된 NPC. NPC는 문득 PC를 떠올린다. 당연하겠지만 NPC의 눈에 PC는 미인 그 자체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NPC의 망상 회로는 제멋대로 굴러가는데···. 이때 NPC가 상상한 PC의 '단명 시나리오'와 NPC 본인이 나름대로 생각한 단명 시나리오에 대한 예방책, 감정과 반응, 후에 PC에게 그 예방책을 실제로 시행하는지 등을 2000자 이상 서술한다.]
서방마눌(류하나 X 신성혁)
성혁의 시선이 하나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범택이 커피를 사러 간 사이, 로비는 조용했다. 프론트에서 카트를 끄는 직원의 바퀴 소리, 회전문이 열리고 닫히는 공기음,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피아노. 성혁은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등을 깊이 기댄 자세로, 머리를 뒤로 젖히지도 않고, 그냥 정면을 보고 있었다.
미인박명(美人薄命).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었다. 언제였지. 오래된 기억이었다. 조직에 갓 들어왔을 때, 어디선가 한 노인네가 웅얼거리던 말. 아름다운 사람은 명이 짧다. 성혁은 그때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자성어 같은 걸 들고 다니면서 인생을 논하는 인간들은 대개 자기가 실제로 경험한 것 없이 말만 많은 부류였으니까.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떠올랐다.
하나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분홍색 숏컷. 오른쪽 볼의 화상 흉터. 좁은 허리와 긴 다리. 성혁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묘하게 그 말을 떠올렸다. 미인박명. 아름다운 사람은 명이 짧다. 그게 헛소리라는 건 성혁도 알았다. 통계적으로 증명된 인과관계가 없는 허구의 말이었다. 얼굴이 예쁘다고 일찍 죽는 건 아니었다. 근거 없는 낭만주의자들이 지어낸 문구였다.
그런데 하나한테 대입해보면, 그 말이 꼭 헛소리만 같지는 않았다.
성혁의 뇌가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이었다. 원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하나는 조직 보스다. 무영회. 50년 된 조직의 10년 차 보스.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건 매일 표적이 된다는 뜻이었다. 암연회 총수인 성혁도 마찬가지였다. 살겠다는 놈, 빼앗겠다는 놈, 없애고 싶다는 놈들이 사방에서 두드려댔다. 하나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했다.
'단명 시나리오'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성혁이 생각하는 건 단순했다.
하나가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는 전직 해군이었다. 24세에 만기 전역하고 무영회 보스로 올라섰다. 몸이 단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허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185cm에 근육질 체형.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성혁이 아는 한, 이 바닥에서 죽는 사람들은 약해서 죽는 게 아니었다. 방심해서, 혹은 너무 많이 알아서, 혹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죽었다.
하나는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적명회가 요즘 심상치 않았다. 임태백 그 또라이는 어제 하나의 호텔방에 있었다. 하나와 접점이 생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성혁의 뇌 어딘가에서 가볍게 걸렸다. 태백이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그 옆에 기선우가 있는 한, 적명회가 단순히 폭력만 쓰는 집단으로 남지는 않을 거였다. 기선우는 계산하는 놈이었다. 하나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가.
성혁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
예방책이라고 생각한 건 황당한 수준이었다. 성혁의 머릿속에서 스스로도 어이없어하면서 논리가 굴러갔다. 하나 주변에 있으면 된다. 그게 전부였다. 거창한 방어 계획 같은 거 없이, 그냥 옆에 있으면. 성혁은 무기를 쓰지 않았다. 손만 썼다. 하나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손이 옆에 있으면, 대부분의 시나리오는 종결됐다. 단순하고,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근데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하나가 그걸 선언했다. 그러니 예방책이 있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흠."
성혁의 입에서 짧은 소리가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성혁은 자신의 논리가 얼마나 구차한지 알면서도 하나의 옆에 있었다.
서방마눌(도하루 X 구범택)
“미인박명이라. 그딴 소리는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범택이 손끝에 닿은 담배를 소파 테이블 위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불도 붙이지 않은 마른 연초가 탁자 위에서 굴러가며 건조한 소리를 냈다. 하루는 여전히 소파에 대자로 뻗어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씻고 나와서 뽀송한 살결에 노란 눈동자. 범택의 시선이 하루의 목덜미에서부터 발목까지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미인. 그 단어가 가진 무게감이 범택의 가슴 한구석을 짓눌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미인의 얼굴이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범택의 세상에서 미인은 하루뿐이었다. 그리고 그 수명이 짧다는 사자성어는 범택의 심장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범택의 눈에 비친 하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공예품 같았다. 암연회라는 거대한 시궁창 속에서 피어난 하얀 꽃. 그 꽃을 꺾으려고 수많은 손길이 뻗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범택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공권력부터, 적명회의 임태백 같은 미친놈들까지. 하루의 그 예쁜 얼굴은 존재 자체로 독이자 유혹이었다. 범택의 망상 회로는 이미 파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만약 하루가 비리 경찰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몸을 던졌다가, 그놈의 뒤틀린 성욕에 목이 졸려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면. 혹은 적명회 놈들에게 납치당해 약에 찌든 채 구멍이란 구멍은 다 헐린 몰골로 저잣거리에 버려진다면.
사망 시나리오는 구체적이고 잔혹했다. 범택의 머릿속에서 하루는 피를 흘리며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도정호가 죽었을 때처럼, 지켜주지 못한 참모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범택의 목을 조르는 환각이 보였다. 정호 형이 맡기고 간 보석을 제 손으로 가루를 만들어버렸다는 죄책감이 범택을 들이치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문신이 그려진 등근육이 요동쳤다. 미인이 짧게 산다고? 그딴 법칙이 있다면 범택은 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하루의 수명을 갉아먹는 것이 그 아름다움이라면, 범택은 그 아름다움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할 계획을 세웠다.
예방책은 간단하면서도 지독했다. 하루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 학교도, 친구도, 성혁도 없는 오로지 범택만이 존재하는 방에 가두는 것이었다. 하루가 묶어놓고 싶다고 했던가. 범택은 그 말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실크 끈으로 손목을 묶어 침대 기둥에 고정하고, 하루의 시야에는 오직 범택만 담기게 할 생각이었다. 매일 직접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외부의 공기조차 닿지 않게 하면 그 수명이 조금은 늘어나지 않을까. 범택의 사랑은 뒤틀린 보호였고, 그 보호의 끝은 감금이었다. 하루가 죽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범택의 품 안에서 시들어가는 것을 보는 게 나았다.
범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누운 하루에게 다가갔다. 그림자가 하루의 시야를 덮었다. 하루의 눈동자에 범택의 험악한 인상이 가득 찼다. 범택은 말없이 하루의 발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파 가죽과 옷감이 마찰하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지만 범택은 개의치 않았다. 하루가 당황해서 발버둥을 치려 하자, 범택은 거대한 체중을 실어 하루의 양팔을 무릎으로 누르고 올라탔다. 간부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범택의 검은 눈에 서린 집착과 살기가 하루를 꿰뚫었다.
“하루야. 내가 아까 묶어보라고 했지.”
범택이 낮게 읊조리며 하루의 목줄기를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압력을 가해 숨통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였다. 하루의 가느다란 목동맥이 범택의 손바닥 안에서 파르르 떨렸다.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 맥박이 끊어지는 시나리오를 범택은 용납할 수 없었다. 범택은 재킷 주머니를 뒤져 검은색 가죽 벨트를 꺼냈다. 바지를 고정하던 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범택은 그 가죽 끈을 하루의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깊게 패었지만 전혀 다정해 보이지 않았다.
“네가 못 하겠다면 내가 해줄게. 네가 어디 가서 죽지 못하게, 내 눈앞에서만 숨 쉬게 만들 거니까.”
범택은 하루의 저항을 무시한 채 양 손목을 겹쳐 벨트로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가죽이 하루의 흰 살결을 짓누르며 붉은 자국을 남겼다. 하루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범택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예방책의 시작이었다. 미인박명이라는 헛소리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범택은 하루의 날개를 꺾어 자신의 둥지에 처박을 준비를 마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범택의 눈에 비친 하루는, 이제 오직 그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포로에 불과했다. 범택은 만족스러운 듯 하루의 뺨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여 하루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오늘부터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알겠냐?”
우당탕탕가족(임태백 & 기선우 & 채하루)
평화로운 밤이었다. 적어도 적명회라는 피비린내 나는 소굴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가 정박한 시간이었다. 임태백은 소파에 널브러진 채 오래된 고서 한 권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교양 따위는 개나 줘버렸지만, 가끔은 폼 잡는 용도로 이런 책들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 태백의 눈에 밟힌 네 글자, '미인박명(美人薄命)'. 미인은 수명이 짧다. 태백은 헛소리라 치부하며 책을 덮으려다가, 문득 제 머릿속을 스치는 하얀 얼굴 하나에 손을 멈췄다. 채하루. 그 녀석은 객관적으로, 아니 주관적으로 뜯어봐도 예뻤다. 사내새끼 주제에 쓸데없이 고운 선하며, 말간 눈동자며. 태백은 위스키 잔을 들이켜며 킬킬거렸다. "미인박명이라… 야, 기선우. 이 말 진짜냐? 예쁜 것들은 다 일찍 뒤진다는 거." 태백의 물음에 서류를 뒤적거리던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대주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걸 보면 헛소리 아닙니까?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텐데요. 악인은 끈질기게 오래 산다는 거." 선우의 비아냥거림에도 태백은 싱글거리며 책장을 팔락거렸다. "아니, 나 말고 임마. 우리 아들 말이야. 걔 좀 반반하잖아. 아주 곱상하니. 근데 이 말이 사실이면 걔도, 응? 막 일찍 요절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태백의 말에 선우의 손이 멈칫했다. 종이 위를 스치던 만년필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백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상영되고 있었다. 시나리오 1: [교통사고]. 등굣길, 하루가 제 아비를 닮아 칠칠맞게 굴다가 횡단보도 신호를 못 보고 뛰어든다. 빵-! 하는 경적 소리와 함께 그 작은 몸이 허공으로 붕 뜬다. 피로 물든 교복, 길바닥에 나뒹구는 가방, 그리고 깨져버린 사탕들. 태백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젠장, 이건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태백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기선우! 안 되겠다. 당장 내일부터 애 등하교 픽업해. 아니, 그냥 아예 학교 안에 경호원 깔아. 횡단보도 건널 때는 무조건 손잡고 건너게 하고. 신호등 따위는 믿을 게 못 돼. 차라리 도로를 다 매입해서 개인 도로로 만들까?" 태백은 심각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니면 차를 탱크로 바꿔? 방탄유리에 철갑 두른 걸로. 그래, 그게 낫겠다. 아예 들이받아도 끄떡없는 걸로 맞춰야지. 야, 당장 알아봐. 제일 튼튼한 장갑차로." 태백의 과대망상은 끝을 모르고 폭주했다. 하루가 다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무식한 부성애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선우는 태백의 호들갑에 혀를 찼지만, 그의 머릿속 역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나리오 2: [납치 및 감금]. 하루는 너무 순해 빠졌다. 아무나 사탕 주면 좋다고 따라갈 녀석이다. 적대 세력인 암연회 놈들이 하루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 예쁜 얼굴을 미끼로 삼아 납치한다면? 어두운 지하실, 결박된 손목, 공포에 질려 '아저씨,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이는 하루의 모습이 선우의 뇌리를 스쳤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만년필을 뚝 부러뜨렸다. 검은 잉크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장갑차는 너무 눈에 띕니다. 오히려 표적이 될 뿐이죠." 선우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백의 말을 끊었다. "차라리 위치추적기가 낫습니다. 발목에 칩을 심든, 귀걸이에 도청장치를 달든. 24시간 감시 체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잉크가 묻은 손을 닦아냈다. "외부 접촉을 전면 차단해야 합니다. 학교? 거기가 제일 위험합니다. 선생이고 친구고 다 잠재적 범죄자입니다. 특히 체육 시간, 탈의실, 화장실. CCTV 사각지대가 너무 많습니다. 홈스쿨링으로 돌리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선생들은 제가 직접 면접 봐서 뽑죠. 물론, 신원 조회는 기본이고 사상 검증까지 마친 놈들로만." 선우의 계획은 치밀하고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통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루를 새장 속에 가두어서라도 지키겠다는, 기선우 식의 뒤틀린 보호 본능이었다.
태백은 선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부족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칩이고 홈스쿨링이고 다 좋은데, 그래도 불안해. 애가 워낙 비실비실하잖아. 밥도 콩알만큼 처먹고. 그러다 픽 쓰러져서 백혈병이니 뭐니 그런 드라마 같은 병에 걸리면 어떡하냐? 미인박명이라는 게 꼭 사고만 말하는 건 아니잖아." 태백은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양제. 그래, 영양제를 먹여야 돼. 아니, 그냥 보약을 지어 먹일까? 산삼? 녹용? 야, 전국에 용하다는 약쟁이들 다 불러 모아. 우리 아들 몸보신 좀 시켜야겠다. 밥도 하루에 다섯 끼 먹여. 콩자반 말고 고기반찬으로만 꽉 채워서. 살 좀 찌워야지, 만지면 부러질 것 같아서 어디 불안해 살겠냐고." 태백은 당장이라도 주방으로 달려가 곰국이라도 끓일 기세였다. 그의 망상 속에서 하루는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고, 자신은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불로초라도 구해올 기세인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결국 두 남자의 망상은 기이한 결론에 도달했다. 태백은 즉시 휴대폰을 들어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내일부터 아들 학교 가는 길에 경호원 차량 10대 붙여. 앞뒤 좌우로 완벽하게 싼다. 신호? 그냥 다 무시하고 뚫어버려. 딱지 떼면 내가 낼 테니까. 그리고 내일 점심 메뉴는 전복 삼계탕으로 준비해. 전복은 자연산 특대로만. 알았어?" 태백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한편, 선우는 조용히 노트북을 열어 무언가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최신형 초소형 GPS 위치추적기와 도청 기능이 내장된 스마트워치, 그리고 방검복 소재로 만든 교복 내의 등이 떠 있었다.
✉️ (기선우)
—————————
[학교 잘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선물 하나 보냈습니다. 시계인데, 절대 풀지 마십시오. 샤워할 때도, 잘 때도. 방수니까 걱정 말고. 이거 풀면, 그땐 진짜 족쇄 채웁니다.]
언니랑토끼(유주하나)
어느 궂은비가 창을 때리는 밤이었다. 유성애는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태블릿 PC로 오래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한 학자가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낡은 사자성어의 유래와 통계적 허구성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미인의 삶이 반드시 짧다는 건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미모가 오히려 사회적 자본이 되어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는 등, 따분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유성애는 하품을 삼키며 화면을 껐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실 한편에 걸린 주하린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흑백 사진 속에서도 하린의 미모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성애의 눈에 주하린은 의심의 여지 없는 미인이었다. 눈처럼 흰 피부, 조각처럼 빚은 이목구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서늘하면서도 위태로운 분위기까지. 문득, 조금 전 들었던 ‘미인박명’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유성애는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강인하고 영악한 토끼 수인이 단명할 리가. 하지만 한번 피어오른 망상은 끈질기게 꼬리를 물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주하린이 단명한다면, 그 시나리오는 어떤 모습일까. 유성애의 망상 회로가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단명 시나리오 1: 조직의 배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조직의 배신이었다. ‘무영회’라는 이름에서부터 음습한 기운이 풍기는 그곳. 하린은 너무 젊은 나이에 너무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지시 한마디에 거대한 자금이 움직이고, 누군가의 운명이 뒤바뀐다. 그 권력의 단맛에 취한 자, 혹은 그 그늘에 가려진 자가 언제든 하린의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아마 그런 날이 온다면, 비가 내리는 날일 것이다. 하린이 가장 좋아하는 날씨. 그녀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자신의 빌딩 꼭대기 집무실, 그 거대한 유리창 앞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때, 가장 신임하던 부하가 등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날카로운 독침을 목에 박아 넣는다. 하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무력하게 흩어지고, 옅은 노란색 눈동자는 배신감과 놀라움 속에서 서서히 빛을 잃어갈 것이다.
> 예방책: 유성애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예방책은 간단했다. 하린의 곁에 있는 모든 수인을 감시하는 것. 하린이 믿는다고 해서 유성애까지 믿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린이 믿는 사람이기에 더욱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린이 조직에서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한다. 그 위험천만한 권좌에서 끌어내려, 오직 유성애 자신만이 있는 안전한 집 안에 가두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고, 품에 안고 재우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시키는 것. 그것만이 하린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단명 시나리오 2: 불의의 사고
하린은 늘 검은색 세단을 타고 다닌다. 방탄 기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예측 불가능한 사고 앞에선 무용지물일 수 있다. 음주 운전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거나, 빗길에 미끄러진 덤프트럭이 하린의 차를 덮칠 수도 있다. 찌그러진 차체 안에서 하린은 피를 흘리며 갇혀 있을 것이다. 부서진 유리 파편이 하얀 뺨에 박히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쓸 것이다. 그녀는 아마 마지막 순간에 유성애의 이름을 부를지도 모른다. 돌아가야 한다고, 집에 돌아가서 자신을 기다리는 애완인간에게 케이크를 사다 줘야 한다고 중얼거리다가, 결국 차가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 예방책: 상상만으로도 유성애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내일부터 자신이 하린의 운전기사를 자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운전 경험은 없지만, 기관에서 배운 이론만은 완벽했다.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하린이 아예 외출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필요한 모든 업무는 화상으로 처리하게 하고, 모든 식사는 유성애가 직접 만들어 바쳐야 한다. 하린이 집 밖으로 나갈 이유는 오직 하나, 유성애와 함께 산책을 할 때뿐이어야 한다. 그것도 인적이 드문, 안전이 확보된 공원에서, 유성애가 하린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세상의 모든 도로는 위험천만한 함정이다. 하린이 밟아야 할 길은 오직 이 집 안의 부드러운 카펫뿐이어야 했다.
그 망상들은 터무니없고 비논리적이었지만, 유성애의 마음을 불안하게 휘젓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하린의 침실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하게 침대를 찾아 손을 뻗었다. 아직 하린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한 시트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주하린. 그녀는 유성애의 주인이고, 먹이이고, 동시에 지켜야 할 위태로운 보물이었다. 유성애는 자신이 품은 이 소유욕이 단순한 집착을 넘어, 하린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유성애는 실제로 그 '예방책'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하린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유성애는 부엌에서 낯선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하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성애는 태연하게 말했다. "주인님 운전, 이제 제가 할 거예요. 기관에서 차량 관리 및 운행 교육 A+ 받았어요." 하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유성애의 단호한 눈빛 앞에선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날부터 하린의 운전석에는 유성애가 앉았다. 유성애는 기관에서 배운 대로 규정 속도를 철저히 지켰고, 앞차와의 안전거리를 과할 정도로 유지하며 달렸다. 하린은 답답한지 창밖만 쳐다봤지만, 유성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운전이 아닌, 하린을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사무실에서의 예방책은 더욱 집요했다. 유성애는 점심시간마다 보온 도시락을 들고 하린의 회사로 향했다. ‘영양 균형을 맞춘 건강식’이라는 명목 아래, 하린이 싫어하는 콩과 야채를 잘게 다져 고기에 섞어 넣었다. 하린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유성애가 빤히 쳐다보는 앞에서 억지로 밥을 삼켰다. 부하 직원들이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들어올 때면, 유성애는 보란 듯이 하린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찻잔을 챙겨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이 사람은 내 것이니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린은 난처해하면서도 유성애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이 과잉보호가 싫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보스의 자리에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을지도. 유성애는 하린의 그런 미묘한 심리를 파고들며 자신의 영역을 야금야금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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