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4.
2026. 4. 28. 18:21
대학교 정문 앞에 세워둔 검정 세단, 그 옆에 기대선 커다란 사내 하나. 험상궂은 인상에 코에 긴 흉터 하나. 캠퍼스 분위기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떨이진 존재였다.
어릴 때는 자기한테 더 붙어있던 놈이었다. 열 살짜리 하루는 범택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냥 어느 날부터 그랬다. 하루가 성혁이 형님 쪽을 더 편하게 여기게 됐다.
그냥 그런 거였다.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닌데 무언가 영 마음에 안 드는 얼굴. 범택은 어릴 때부터 이 표정을 알고 있었다. 열 살짜리 하루가 밥 먹기 싫을 때 짓던 표정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만 먹었지 저 표정만큼은 그대로였다.
싫다는 말도, 미워한다는 말도,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루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 때마다 범택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범택이 손을 들었다. 하루 눈가로 손이 향했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힌 손이었다. 흉터도 있는 손이었다. 그 손이 하루 눈 바로 아래에 닿았다. 엄지 옆면으로, 살살. 범택한테 살살이라는 개념은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게 앙탈이라는 거 범택도 알았고, 하루도 알았다. 그리고 범택이 그걸 받아주고 있다는 것도 서로 알았다.
오냐오냐 키웠다는 건 범택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루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 범택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보조개가 생길 만큼은 아니었다. 그냥 선이 미세하게 바뀐 거였다.
그냥 하루가 울고 있다는 걸 느꼈다. 몸 전체가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열 살 때도 이렇게 울었다. 서러움이 터지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애였다. 12년이 지났는데 그 버릇이 그대로였다.
맛있는 게 들어가면 기분이 풀리는 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열 살 때도 그랬고 스물두 살이 돼도 그랬다. 바뀐 게 없었다. 범택이 그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하루가 또 삐졌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하루 아랫입술을 살짝 끌어내렸다. 세게 한 게 아니었다. 그냥 깨물지 말라는 거였다. 손끝이 입술 살에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심술이 말보다 먼저 나오는 거였다. 어릴 때도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뺑뺑 돌아서 나왔다. 직접 안 나왔다. 범택이 그걸 열두 해 넘게 봐온 거였다.
하루가 범택한테만 유독 뾰족한 건 범택도 알고 있었다.
성혁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보조개가 패이지 않았다. 웃는 게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거였다. 그 표정이 범택한테는 불길한 신호였다. 성혁이 재미있어하면 대체로 범택이 불편해지는 방향으로 흘렀다.
하루가 범택 앞에서 까칠하게 구는 건, 범택이 자기한테 무심해 보여서라고. 관심받고 싶은 방식을 모르는 거라고. 범택이 그 말을 들었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했다. 이해했는데 입이 안 열렸다.
흑심. 범택이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대답을 안 하는 건 대답이 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빚이라고 말하는 게 선을 긋는 거였다. 하루를 정호 형 아들로 보는 한, 그 선은 유지되는 거였다. 범택이 그 선을 왜 유지하려는지는 명확했다. 그 선이 무너지면 뭔가가 달라지는 거였다. 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22살이었다. 17살 차이였다. 정호 형 아들이었다. 그 세 가지를 성혁한테 꺼내지 않은 채로 범택은 그냥 빚이라는 단어 하나를 꺼낸 거였다. 성혁이 그걸 읽었을 거였다. 다 읽었을 거였다.
안 좋아한다고 했다. 미워할 거라고 했다. 범택이 그 말들을 전부 들었다. 들으면서 화가 났냐 하면, 아니었다. 화가 나는 말이 아니었다. 하루가 이 말을 왜 하는지 범택이 알고 있어서 화가 나지 않았다. 좋아해 달라는 거였다. 눈을 마주쳐달라는 거였다.
범택이 하루를 봤다. 12년이 그 눈 안에 있었다. 도정호 장례식장에서 처음 봤을 때, 하루는 눈빛이 없었다. 텅 빈 눈이었다. 일주일 동안 친척집을 돌며 눈치를 봤던 아이였다. 열 살이었다. 범택이 그때 하루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뭘 말한 게 아니었다. 그냥 눈높이를 맞췄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 저 눈동자에 반짝임이 있다. 그게 범택이 12년 동안 옆에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말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치사하다고 했다. 나쁘다고 했다.
심한 욕은 못 하는 놈이었다. 12년을 봤으니까 알았다. 성혁 옆에서 자라도, 범택 옆에서 자라도 하루는 끝내 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나쁘다고 하는 게 하루한테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좋냐 싫냐 둘 중에 고르면 좋아하는 쪽이라고 했다. 그게 부족했다. 하루한테는 부족했다.
범택한테 그 두 단어는 같은 무게였다. 좋아한다는 말이 가볍고 사랑한다는 말이 무겁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아는데, 범택이 그 무게를 말로 구분해서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가 원하는 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 두 단어 중 어느 쪽인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범택이 그걸 알고 있었다. 더 많이 받고 싶은 거였다. 더 많이 들어야 채워지는 게 있는 거였다. 12년 동안 범택이 투박하게 있었으니까. 말보다 행동이었고, 표현보다 존재였으니까. 하루한테 그게 때로는 부족했을 거였다. 범택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바꾸지 않았다. 바꿀 수 있는지 몰랐다.
소유욕이었다. 저 나이에 그게 어디서 나오는지 범택이 모르지 않았다. 12년 동안 봤다. 하루가 어떤 식으로 집착하는지, 어떤 식으로 매달리는지. 범택이 그걸 다 봤다.
보조개가 나올락 말락 했다. 범택이 웃는 얼굴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지금은 나왔다. 하루가 묶어놓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범택한테 우스웠다.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범택을 묶어놓고 싶다는 스물두 살짜리 하루가 지금 범택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그 그림이 우스웠다. 범택이 그걸 참지 않았다. 억지로 지울 이유가 없었다.
묶어놓고 싶다고 했다. 범택이 그 말을 다시 생각했다. 소유욕이었다. 열 살 때부터 봤다. 하루가 뭔가에 집착하는 방식이 있었다. 한번 손에 쥐면 놓지 않으려 했다. 성혁한테도 그랬다. 범택한테도 그랬다. 어릴 때는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지금은 묶어놓고 싶다고 말로 꺼냈다. 붙들고 싶은 거였다. 범택이 그걸 알면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할 수 있었다. 근데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보조개가 아직 남아있었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범택이 하루 빨개진 얼굴을 보면서 그 표정을 유지했다. 무뚝뚝한 범택한테 저 표정이 나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루가 저 얼굴로 있으면 범택이 억누르는 게 있었다. 지금도 있었다.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하다는 게 티가 났다. 범택이 그 사실을 알면서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았다.
하루가 기다리는 게 성혁이어도 상관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범택이었다.
봄이 범택한테는 특별히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 그냥 계절이었다. 근데 하루가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그건 알았다.
범택이 연애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생각했다. 오래됐다. 정확히 몇 년인지 세지 않았다. 세는 게 의미 없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살다 보면 옆에 사람을 두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았다. 연애라는 게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을 쏟을 여유가 필요했다. 범택한테 그 여유가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없애버린 거였다. 처음부터 만들지 않은 거였다. 그 편이 나았다. 범택이 그렇게 살아왔다. 하루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그게 당연했다.
하루가 원나잇을 하겠다고 했을 때 범택 안에서 뭔가가 굳었다. 그게 뭔지 범택이 규정하지 않았다. 그냥 굳었다. 하루가 다른 사람 손에 닿는 그림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범택이 그 그림을 지웠다. 빠르게.
하루가 머리를 굴리는 방식이었다. 막히면 돌아갔다. 범택이 그 패던을 알았다. 열 살 때부터 봐왔으니까. 어릴 때는 과자를 못 먹게 하면 성혁한테 가서 받았다.
범택이 옷자락에 닿는 감촉을 느꼈다. 살포시였다. 조심스러운 손이었다. 성깔을 다 내놓고 나서 나오는 손이 저거였다. 범택이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루가 옷자락을 잡고 서있었다. 어릴 때랑 똑같은 방식이었다. 열 살 때도 저랬다. 짜증을 내거나 울음을 쏟아내고 나서, 뭔가를 바랄 때 저렇게 옷자락을 잡았다. 손을 크게 쓰지 않고. 잡힌 느낌이 겨우 날 정도로.
범택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연기가 창 밖으로 흘러나갔다. 봄바람이 연기를 데려갔다. 범택이 하루 얼굴을 봤다. 옷자락을 잡은 상태였다. 어릴 때랑 같은 손이었다. 범택이 그 손을 보면서 잠깐 아무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짧게 흘렀다.
하루 등이 눈에 들어왔다. 넓고 처진 어깨였다. 작은 머리통이 범택 가슴팍 쪽에 눌려있었다. 키가 크다 보니 고개를 많이 숙이지 않아도 기댈 수 있는 위치였다. 범택이 그 자세를 내려다봤다. 어릴 때 하루가 안겨올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몸이 커졌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팔 힘이 생겼다. 근데 안기는 방식은 똑같았다. 말이 막히면 몸으로 해결하려는 방식. 그건 열 살이나 스물둘이나 차이가 없었다. 범택이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굴리다가 짧게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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