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2026. 5. 11. 20:31
데이트라는 단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범택이 그 단어에 담긴 무게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몰랐다. 모르는 쪽이 정확했다. 범택이 살아온 방식에 데이트라는 개념은 없었다. 원나잇은 있었다. 데이트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말이었다.
범택이 재킷 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두 번 접었다. 손목이 드러났다. 문신이 살짝 보이는 자리였다. 재킷을 걷자 조금 나아졌다.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 약간 풀렸다.
하루 등이 손에 닿을 거리에 들어왔다. 범택이 손을 뻗었다. 후드티 모자 아래 목덜미 근처를 잡지 않았다. 그건 거칠었다. 대신 후드티 자락을 가볍게 쥐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다. 그냥 손에 쥔 채로 같이 걸음을 멈췄다. 하루가 헐떡이면서 돌아봤다. 범택의 숨도 약간 차 있었다. 정장 차림으로 백 미터 넘게 빠른 걸음으로 따라온 게 평소 운동량보다 컸다. 그래도 하루보다는 덜 헐떡였다.
하루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범택도 하늘을 봤다. 구름이 없었다. 파란색이 진하게 내려앉은 오후 하늘이었다. 봄 하늘은 여름처럼 강렬하지 않고, 겨울처럼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맑았다.
하루가 도정호 자식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범택이 하루 옆에 있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쓸 줄 몰랐다.
사탕발린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범택이 그 판단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뭔가 웃겼다. 범택이 달콤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루가 생각하는 거라면, 12년 동안 옆에서 뭘 봐온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빠를 그런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했으면 편했을 거라는 말이 귀에 남았다. 범택이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굴렸다. 편했을 거라는 말이었다. 하루한테 편한 게 뭔지 생각해 봤다. 도정호를 사랑한다고 했으면, 그러면 범택이 하루한테 잘하는 이유가 정리됐을 거라는 말이었다. 도정호 때문이니까. 그 사람 자식이니까. 그렇게 정리가 되면 하루가 가지고 있는 의문이 하나 사라지는 거였다. 근데 범택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틀린 말을 해서 하루를 편하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범택은 그런 방식을 쓰지 않았다. 하루한테도, 누구한테도.
뚱한 표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미간의 주름도 아직 있었다. 범택이 그걸 보면서 손을 올려 하루 미간에 엄지손가락을 댔다. 주름 잡힌 곳에 엄지가 닿았다. 살짝 펴는 듯이 눌렀다가 뗐다. 거칠고 굳은살 박힌 손이었다. 그래도 힘을 주지 않았다. 가볍게 댔다가 거뒀다.
범택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웃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올라갔다. 하루가 반박은 안 받는다고 했다. 그 단호함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곘는데 밉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웃겼다. 범택이 어릴 때부터 하루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를 봐왔다. 어떤 결론을 혼자 내리고 그걸 못 박는 눈빛이었다. 열두 살 때도 저랬다. 열다섯 살 때도 저랬다. 스물둘이 된 지금도 같은 눈빛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범택이 먼저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색했다. 그런데 하루가 정해줬다고 했다. 반박은 안 받는다고 했다. 범택이 그 말을 듣고 그게 틀린 말인지 아닌지 생각해 봤다. 틀린 것 같지 않았다. 구분을 못 한다고 했는데, 하루가 사랑이라고 정리해 줬다. 그 정리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면 맞는 말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는 하루가 화를 낸다면, 범택은 그걸 받아낼 생각이 있었다. 12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하루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천히 물드는 게 아니었다. 빠르게 번졌다. 귀 끝까지 올라왔다. 범택이 그걸 봤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근데 모른 척이 안 됐다. 하루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아랫입술이 떨렸다. 눈이 동그랗게 열려 있었다. 범택을 마주보는 눈이었는데 흔들렸다.
성혁이 했던 사랑해랑, 범택이 했던 사랑해가 하루한테 다르게 들렸을 거라는 것도. 그 차이가 뭔지 하루가 알면서도 모르는 것 같았다. 범택은 더 잘 알았다. 알면서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꺼낼 말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뺨이었다. 귀가 빨갰다. 눈동자가 아직 흔들렸다. 범택이 그걸 보면서 손을 들어 하루의 뺨에 손등을 댔다. 뜨거웠다. 역시나 뜨거웠다. 범택이 손등으로 온도를 확인하듯 한 번 닿았다가 천천히 거뒀다.
무표정이었는데 아주 조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보조개가 살짝 드러났다. 범택이 그걸 감추지 않았다. 하루한테 뭔가 말을 요구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억누르려고 했는데 안 됐다.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범택이 그걸 감추지 않았다.
하루의 얼굴이 아직 뜨거워 보였다. 식을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범택이 보조개를 드러내고 웃으니까 더 올라가는 것 같았다. 범택이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 손을 들어 하루의 귀 옆을 짚었다. 귀 끝이 닿았다. 뜨거웠다.
범택이 하루를 보면서 지금 하루의 얼걸울 기억하고 있었다.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자꾸 눈이 갔다. 스물두 살짜리 하루가 얼굴을 붉히고 변태라고 욕하는 얼굴이었다. 아까 뚱해서 으르렁거리던 얼굴이랑 달랐다. 약하고 어린 얼굴이었다. 범택이 12년 동안 봐온 얼굴들이 있는데, 그 목록 어디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범택이 그 얼굴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지 몰랐다. 첫사랑 같은 거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그 생각을 바로 잘라냈다.
하루가 뚱한 얼굴로 범택을 올려다보는 각도가 열 살 때랑 달랐다. 그때는 훨씬 더 올려다봐야 했다. 지금은 그 차이가 조금 줄어 있었다. 그래도 범택이 하루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심통 나서 안 간다고 버티던 하루가 아이스크림 얘기 하나에 저렇게 됐다. 어릴 때부터 달달한 거 앞에서는 꼭 저랬다. 기분 나쁜 것도 잠깐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범택이 그걸 보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내렸다. 억눌렀다. 성공은 반쯤 했다. 보조개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똥강아지라고 부른 적도 병아리라고 부른 적도 근래에는 없었다. 하루가 크면서 그 호칭들은 자연스럽게 쓰지 않게 됐다. 성혁이 가끔 꺼냈지만 범택은 아니었다.
너무 많이 좋아해서 문제라고 했다. 범택이 그 말을 머릿속에서 한 번 굴렸다.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금요일이 공강인 것도 알고, 수업이 언제 끝나는지도 알고, 오피스텔 층수도 알고, 즐겨 먹는 것도 알았다. 성혁이 하루한테 직접 말했다는 것도 알았다. 범택이 정보를 넘겨줬다고. 들켰다고 자각이 없지는 않았다. 근데 딱히 숨기려 한 적도 없었다. 범택이 하루를 향해 시선을 두면서 한쪽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12년이었다. 도정호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그때 하루는 열 살이었다. 친척집을 배회하면서 눈칫밥을 먹던 얼굴이었다. 범택은 그 얼굴을 지금도 기억했다. 지금 하루 얼굴이랑 겹쳐서 봤다. 많이 달라졌다. 키도 커졌고 얼굴도 달라졌고 목소리도 달라졌다. 근데 범택한테 뭔가를 속삭이는 방식은 그때랑 비슷했다. 가까이 붙어서 낮게 말하는 방식. 그게 안 달라졌다.
너무 많이 좋아해서 문제라고 했다. 범택이 그 말을 다시 굴리면서 짧게 코로 숨을 내쉬었다. 문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하루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괜찮았다. 오히려 괜찮았다.
보조개가 패였다. 오래 지속되는 웃음이 아니었다. 짧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이상한 감정이 아니었다. 범택의 기준에서는. 버려진 아이를 봤을 때 뭔가가 걸렸고, 그 걸림이 12년 동안 유지됐다. 자라는 걸 옆에서 봤고, 웃는 걸 봤고, 화내는 걸 봤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도 봤다. 그 전부가 쌓여서 지금 상태가 됐다.
그때 하루의 손이 작았다. 차가웠다. 겁을 먹고 있었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범택이 그 감촉을 아직도 손바닥에서 기억했다. 지금 하루 손이랑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손 길이도 달라지고 온기도 달라졌다. 근데 범택이 손을 잡으면 뿌리치지 않는 건 그때랑 똑같았다.
오래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다. 조직에서 20년을 버텨온 방식도 그랬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때를 봤다. 하루한테도 그 방식이 맞았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하루한테 어떻게 얹히는지. 12년 동안 가족처럼 키웠다는 게 하루한테 꼭 좋은 말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도정호가 하루를 맡기면서 한 말이 기억났다. 마지막이었다. 범택이 그 말을 들었을 때 대답을 못 했다. 지금도 그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성혁이 물티슈로 하루의 입을 닦아주고 있었다. 하루가 짜증을 냈고, 성혁이 피식 웃었다. 범택이 그 광경을 테이블 건너편에서 지켜봤다. 아무 표정이 없었다.
스물두 살짜리가 집창촌을 가고 싶다고 했고, 범택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성혁의 입장에서 황당하게 들릴 수 있었다.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동시에 저게 하루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범택의 목에 매달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범택이 그 상황을 보면서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보조개가 찍힐 듯 말 듯 했다.
하루가 돈을 달라고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안 내줄 생각도 없었다. 범택은 그냥 하루한테 카드 한 장 쥐여줄 생각이었다. 피곤하게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범택은 더 열약한 데서도 잤다. 딱딱한 바닥, 차 뒷좌석, 현장 창고.
올라탄 무게가 느껴졌다. 범택보다 훨씬 가벼웠다. 하루가 복부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고 눈은 범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온 소리가 삼촌은 바보야, 멍청이, 변태였다. 욕을 잘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입이 그렇게 거칠지 않았다. 저게 지금 하루 입장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단어들이었다. 범택은 그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깊은 보조개가 패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다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로 바뀐 건데,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어릴 때 이 애가 어떤 각도에서 자신을 올려다봤는지 기억이 났다. 키가 훌쩍 컸다. 범택이 그 생각을 짧게 스치고 넘겼다.
1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열 살이었던 애가 지금 이 침대 위에 앉아서 새벽에 저런 말을 꺼내고 있다. 범택이 그 거리를 머릿속에서 한 번 재봤다. 12년이었다.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하루가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 범택은 전부 알았다. 어릴 때 어떤 얼굴이었는지도, 지금 어떤 얼굴인지도. 그 모든 걸 알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였다.
범택이 뺨을 감싼 손을 천천히 움직여 하루의 턱을 잡았다. 세게 쥐지 않았다. 엄지와 검지가 턱 양쪽을 살짝 감는 정도였다. 도망가게 두지 않겠다는 방식이었다. 범택이 그 자리에서 하루의 눈을 봤다. 노란 눈동자가 이 거리에서 흔들렸다. 범택이 그 흔들림을 보면서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였다. 어젯밤 하루가 범택의 입술 앞에서 멈췄던 것처럼, 지금은 범택이 그 직전에 있었다. 숨이 섞였다. 초코 체향이 코끝에 왔다.
손목 안쪽 맥박을 손끝이 건드렸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범택이 그 박동수를 느끼면서 하루의 손목을 잡아 이불 위로 천천히 눌렀다.
범택이 벌어진 셔츠 위로 손을 들어 하루의 가슴 중앙에 손바닥을 평평하게 얹었다. 세게 누르는 게 아니었다. 그냥 얹는 방식으로. 손바닥 아래로 하루의 심장 박동이 바로 전해졌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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