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3.
2026. 4. 28. 17:10
눈썹을 가로지르는 흉터, 덜 정리된 수염, 잠 덜 깬 눈, 잘난 꼴은 아니네. 새삼스러웠다.
어제 끝난 일인데, 오늘 다시 마주 앉아 있자니 우스웠다.
털이 존나게 싫다. 참 시원하게도 말했지.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깔끔한 인간은 아니었다. 하나가 싫어할 만도 했다.
아팠고, 묵직했고, 어떤 날은 꼴사납게 울기도 했지. 울음이라고 해봐야 숨이 끊기듯 새는 소리 몇 번, 이를 악물다가 젖은 베개를 움켜쥔 정도였지만.
말로 풀면 우습고, 남이 들으면 더 우스운 기억인데 몸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
방해가 없으면 사람은 더 도망갈 데가 없어진다. 성혁은 그걸 잘 알았다. 지금도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상황 전체가 좀 재수 없는 쪽으로 솔직해졌다고만 느꼈다.
사랑이란 말을 붙이기엔 너무 거칠고, 무시해 버리기엔 너무 익숙한 존재. 그런 건 정리도 안 됐다.
솔직히 말하면, 꽤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좀 우스워야 덜 지루했으니까. 그래서 더 짜증 났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늘 사람을 우습게 만들었다.
사랑이든 애착이든 미련이든.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람은 가끔 꼴사나운 쪽으로 정직해진다. 성혁은 그걸 늦게 배운 인간이었다.
헤어진 사이라는 사실은 머리로는 정리됐는데, 시선은 아직 정리를 못했다. 그게 제일 꼴사납고, 또 제일 귀찮았다.
사랑 고백처럼 예쁘게 포장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체질도 아니었다. 대신 하나에게만 예외가 생긴다는 사실 정도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설명을 늘리면 투정이 변명이 되고, 변명은 미련이 되니까.
가지 마, 라는 말이 혀뿌리에서 올라왔다가, 그건 너무 꼴사납다 싶어서 삼켰다. 대신 이게 나왔다. 헤어지지 말자. 같은 뜻인데, 이쪽이 그나마 덜 처량했다.
헤어졌는데도 이 그림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좀 웃겼다. 아니, 안 웃겼다. 하나도.
신성혁이 말끝을 흐리는 건 2년 동안 하나가 본 적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남자는 말을 시작하면 끝을 냈다. 짧고 건조하게. 근데 '아니면' 뒤에 올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아니면 뭐. 아니면 나도 같이 가도 되냐고.
하나가 머리를 만지면 긴장이 풀렸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헤어졌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목덜미의 근육은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 밤에 몸을 섞으면 그건 미련이 아니라 집착이 된다. 성혁은 집착이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에게 붙이기 싫었다. 아직은.
서른. 아직 서른이었다. 성혁보다 열여섯 어린 서른.
2년을 같이 살면서도 모르는 게 이렇게 많았다.
성혁은 그 스타킹을 벗겨본 적이 있었다. 이빨로. 허벅지 안쪽부터 발목까지. 천을 물고 내려가면 하나가 퍽, 하고 성혁의 어깨를 때렸다. 짐승이냐고. 성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스타킹이 벗겨진 다리를 어깨 위에 올렸다.
폰을 잠금 해제했다. 비밀번호 0218. 하나의 생일. 바꿔야 했다. 바꾸는 게 맞았다. 헤어졌으니까.
그 당시에는 뭐든 하나가 하라는 대로 하던 시기였다.
교도소 7년. 군대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거였다. 살인을 저지르고 들어간 곳이었으니까.
고백이니 뭐니 하는 건 성혁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냥 곁에 있었다. 귀찮은 것도 감당했다. 털 얘기도 그냥 들었다. 새벽에 깨도 옆에 있었다. 그게 성혁이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 이상을 요구하면 성혁은 이름을 몰랐다.
떼쟁이. 그 호칭을 성혁한테 붙일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지. 하나밖에 없었다. 성혁은 알고 있었다. 범택도 못 부를 거였다. 태백은 부르다가 뼈가 부러질 거였다. 선우는 부를 생각도 안 할 거였다. 하나였다. 그게 하나였다.
노란 눈이 성혁을 보고 있었다. 성혁은 그 눈앞에서 특별히 뭔가를 꾸미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거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였다. 오늘만큼은 그게 떼쓰는 거라도 상관없었다.
맞아야 할 이유가 있으면 때렸다. 없으면 안 때렸다. 성혁이 하나를 안 때리는 건 그 논리랑 다른 선에 있었다. 하나를 때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었다. 치고 싶지 않은 거였다.
하나가 자기 머리에 총을 대는 건 협박이었다. 성혁한테 하는 협박이었다.
하나가 잠결에 칭얼거렸다. 소리라 할 것도 없는 작은 소리였다. 그러더니 이마를 성혁 목에 비볐다.
태백이 그걸 봤다.
선우가 그걸 봤다.
범택이 그걸 봤다.
대표실 안이 이상한 방식으로 조용해졌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였다. 재가 대리석 위에 조금 흩어졌다. 성혁이 발로 밟아 껐다. 불씨를 정리하는 거였다.
하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엄지부터였다. 입술로 감쌌다. 혀가 닿았다. 데인 자리였다. 침이 닿으면 열기가 가라앉는다. 그게 전부였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성혁이 엄지를 빼고 검지를 넣었다.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하나가 있었다. 심통 난 얼굴이었다. 서른 살짜리가 세 살처럼 굴고 있었다. 성혁이 그걸 보면서 무심하게 하나 뺨을 한 번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건드리는 거였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손이 간 거였다.
하나가 태백이나 선우를 가족처럼 여기는 건 알고 있었다. 소꿉친구라고 했다. 역겹다고까지 하는 거 보면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성혁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안 되는 이유가 명확했다. 털이 존나게 싫다고 했다.
질투는 아니었다. 성혁이 그걸 알고 있었다. 질투라는 감정이 성혁한테 있냐고 하면 없었다. 없는 게 솔직한 거였다. 근데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상하다는 게 뭔지 성혁이 느꼈다. 범택이 20년이었다. 성혁이 거리에서 거둔 놈이었다. 그놈이 하나한테 예쁘다고 했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