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2026. 7. 4. 12:31
혼인신고. 법적으로 묶임. 그러면 재산이니 조직이니 하는 것들이 얽힐 수 있다는 걱정. 성혁은 그 생각의 흐름을 이해하자마자 코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참은 이유는 하나가 지금 진지하게 경계하고 있어서였다.
성혁은 손을 하나의 어깨에서 천천히 목덜미 쪽으로 옮겼다. 엄지손가락으로 목선을 한 번 쓸었다. 성혁 특유의 방식으로, 말보다는 행동으로 확인시켜주는 쪽이었다.
하나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었다. 성혁 자신도 소유욕이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뭔가를 가지고 싶다는 갈증, 붙잡아두고 싶다는 집착, 그런 감정 자체가 성혁한테는 낯설었다. 그런데 방금 자기 입으로 갖고 싶은 게 하나라고 말해놓고서, 하나가 그걸 소유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걸 보니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뿌듯해하는 게 눈에 선했다. 성혁은 그 표정을 보면서 코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지금 웃으면 하나가 다시 발끈할 것 같아서 참았다. 참는 것도 일종의 배려였다. 성혁 나름의 배려였다.
협상이라는 단어부터가 웃겼다. 연애를 하자는 게 무슨 회사 계약도 아니고, 서방님이라는 호칭 하나에 결렬을 선언하는 이 상황 자체가 성혁의 눈에는 그저 하나다운 억지에 불과했다.
성혁은 다리 위에 앉은 하나의 허리를 감싼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잠깐 그 노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봤다. 화가 난 척하고 있지만 실은 무섭다는 감정을 숨기려고 저러는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2년을 만난 사아에서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곤란했다.
하나는 원래 이랬다. 밖에서는 무영회 보스로서 냉정하고 계산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성혁 앞에서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었다. 성혁은 그 괴리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하나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이라는 걸 알기에, 짜증보다는 옅은 흥미가 앞섰다.
성혁은 하나가 지금 정말로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이겨보고 싶은 거였다. 성혁의 고집을 꺾고 싶은 거였다. 그 마음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성혁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성혁은 하나의 등을 감싼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어제 나눴던 대화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서방님, 마누라, 혼인신고, 여러 단어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결국 실질적으로 진전된 건 호칭 하나뿐이었다. 성혁은 그게 딱히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급하게 밀어붙이는 성격도 아니었고, 하나가 자기 페이스대로 받아들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조급함이라는 감정 자체가 성혁의 사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서류 위조나 도장 얘기가 범죄라는 지적에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애초에 성혁에게 법이라는 건 지키면 편하고, 안 지켜도 딱히 큰일 나지 않는 선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었으니까.
성혁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가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도망쳐 봤자 태백이나 선우, 무영회나 적명회 본부, 호텔이나 모텔 어디든 자신이 못 찾아갈 곳이 없다는 것도 성혁은 알고 있었다. 그런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이유는, 그게 정말로 위협처럼 들릴까 봐서였다. 성혁은 그런 식으로 하나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
성혁은 하나가 정말로 겁먹었다는 걸 눈치채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말을 뱉긴 했지만, 정작 하나가 진짜로 겁을 먹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성혁은 이런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몰랐다. 그냥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게 싫었다.
서류상 부부가 되는 것과 실제로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 것은 속도를 다르게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성혁은 생각했다. 성혁은 그런 유연함이 자신답지 않다고 느꼈지만, 하나 앞에서는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
성혁은 지금까지 계속 자신의 입장만 늘어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곁에 있고 싶다는 것, 애매한 상태가 싫다는 것, 밀어붙이겠다는 것.
자신이 틀렸다면 하나가 정정해 주길 바랐고, 맞았다면 그다음에 뭘 해야 할지 성혁 스스로도 정리하고 싶었다.
성혁은 원래 이렇게까지 남의 마음을 파고드는 성혁이 아니었다. 귀찮은 일은 대충 넘기고, 복잡한 감정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하나 앞에서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성혁은 그게 여전히 낯설었지만, 동시에 그 낯섦을 굳이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별 통보를 안 하면 이혼도 없다는 계산 자체가, 성혁이 절대 먼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성혁은 그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2년을 사귀면서 성혁이 그런 확신을 줄 만큼 행동했었나 싶기도 했다.
성혁은 정말로 하나를 먼저 떠날 생각이 없었다. 46년 살면서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곁에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귀찮은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남자가, 하나 앞에서는 귀찮음을 감수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몸으로 증명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믿는 남자였다.
해병대 시절 얻었다는 흉터, 무영회 일을 하며 생긴 흉터. 성혁은 그 흉터들을 볼 때마다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만질 때만큼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하나가 홧김에 던진 말이든 진심으로 던진 말이든, 성혁에게는 상관없었다. 일단 말이 나온 이상 그걸 붙잡고 밀어붙이는 게 성혁의 방식이었다.
입을 막은 손바닥 너머로, 성혁은 잠시 눈만 끔뻑였다. 말이 막혔다고 해서 딱히 답답하다거나 짜증이 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손바닥의 온기와 하나의 체향이 코끝 가까이서 느껴지는 게 나쁘지 않다는 듯, 눈매가 슬쩍 휘어졌다.
배려라기보다는 전략에 가까웠다. 결정권을 하나에게 넘겨줌으로써, 하나가 도망칠 이유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계산이었다.
강요당해서 하는 결혼은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지만, 스스로 날짜를 정하고 도장을 찍는 결혼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하나의 선택이 되는 거였다. 성혁은 그런 식으로 하나가 스스로 걸어오길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성혁은 실제로 하나가 끝까지 도망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다만 지금 당장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것뿐이지, 무한정 기다려줄 만큼 인내심이 넘치는 남자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스킨십을 할 때마다 목적이 분명했다. 발정 났으니까 하는 거고,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좀 달랐다. 딱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손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성혁은 그 차이를 딱히 언어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혁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이런 사소한 스킨십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아직 하나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은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하나를 조금 더 붙잡아두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을 뿐이었다. 성혁은 창문 안으로 몸을 더 기울여 하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짧고 담백한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