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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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성혁이 태백의 멱살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하나였다. 분홍색 숏컷이 문틈 사이로 보였다. 성혁이 그걸 확인하면서 태백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태백은 셔츠 깃이 찢어진 채 낮은 테이블 위에 반쯤 눌려 있었다. 목에 손자국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선우는 소파 끝에 앉아서 시선을 옆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범택이 문 앞에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총수실이 잠깐 정지했다.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성혁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다 표정 변화가 없는데 대화가 되고 있었다.

 

성혁은 어리광이라는 걸 잘 하지 않았다. 잠에서 덜 깼을 때나 알딸딸할 때를 성혁은 기억했다. 그럴 때 하나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았다. 약하다는 걸 성혁이 몰랐던 게 아니었다. 알면서도 쓰지 않은 거였다.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성혁이 그걸 생각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나의 손목을 한 번 두드렸다.

 

성혁이 하나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리광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었다. 무표정했다. 근데 손가락이 하나의 손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손이 하나의 손 쪽으로 이동했다. 손가락 사이에 하나의 손가락을 끼웠다. 쥐는 힘이 없었다. 그냥 끼워 넣는 거였다. 성혁의 손이 하나의 손보다 훨씬 컸다. 손가락이 하나의 손등을 덮었다.

 

잠에서 덜 깼을 때 스킨십이 늘어나는 거 성혁이 의식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냥 굳이 쓸 이유가 없었다.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구는 게 성혁한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리광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성혁도 알았다. 그게 어리광이 되지 못했다는 것도. 그냥 부탁을 한 거였다. 가지 말라고. 하나한테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성혁이 그걸 생각하면서 턱을 한 번 긁었다. 까슬한 수염이 손바닥에 걸렸다.

 

하나가 성혁이 엄지로 손등을 쓸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터였다. 성혁도 알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하나의 손이 성혁의 손바닥 위에 얹혀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하나의 손가락이 끼워져 있었다. 힘이 세지 않았다. 그냥 걸쳐진 거였다. 하나가 빼려고 하면 뺄 수 있었다.

 

성혁이 하나의 손등 위를 쓸던 엄지를 멈추고 하나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은 자기 손가락을 조금 더 깊게 밀어 넣었다. 힘은 없었다. 그냥 깊어진 거였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맞닿았다. 성혁이 그 상태로 하나를 올려다봤다. 노란 눈동자를 봤다. 귓가가 아직 붉었다.

 

간절함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성혁이 그걸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성혁이 무릎을 꿇거나 하나의 소매를 잡아끌거나 눈물을 짜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게 어리광이라면 성혁은 그걸 모르는 게 맞았다. 근데 간절함이 없다는 말은 좀 달랐다.

 

어리광을 부려보겠다고 했는데 결국 이 모양이었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여기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고, 손깍지를 끼운 게 전부였다. 하나한테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게 성혁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성혁이 마흔여섯이었다. 하나가 서른이었다. 아저씨가 맞았다. 오빠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존나 싫어.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성혁이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개새끼라는 소리는 들어봤다. 욕도 들어봤다. 근데 싫다는 말은 달랐다.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않은 것이었다.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굳이 막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게 전부였다.

 

싫냐고 물으면 솔직하지 못하게 된다. 성혁이 그걸 알고 있었다. 싫다고 말하면 하나가 다음번에 안 할 것이었다. 싫지 않다고 말하면 하나가 또 할 것이었다. 성혁이 어느 쪽이 더 귀찮은지를 따지다가 그냥 둘 다 상관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하나가 하는 게 싫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하나가 면도를 왜 하냐고 되물었지만 성혁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면도를 하면 다시 사귀었을 때랑 같아지는 거냐는 뜻이었다. 성혁이 그 뜻을 풀어서 설명하는 게 귀찮았다. 하나라면 알아들을 것이었다.

 

소유욕이라는 게 성혁에게 없었다. 하나가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고 해서 화가 나거나 질투가 생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상관없어지는 것이었다. 관계가 끊어지고, 얽힘이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굳이 붙잡을 이유도 없었다.

 

성혁이 이쪽 바닥에서 오래 살았다. 하나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내는 방법은 있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 하는 게 귀찮기는 했다. 하나가 직접 말해주는 게 제일 편했다. 성혁이 그 사실을 알면서 하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딸기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성혁이 그 냄새를 맡으면서 하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이 올 것 같은 나른함이 있었지만 이 물음이 남아 있는 동안은 감기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2년 동안 사귀면서 성혁이 헤어진 이유를 추궁하거나 지금 우리가 뭐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가 원하는 대로 했다. 하나가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내버려 뒀다. 그게 성혁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왜 달랐는지 성혁이 굳이 이유를 따져보지 않았다.

 

2년 동안 사귀면서 성혁이 하나한테 말을 많이 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누구한테보다는 말이 많았다. 그게 싫었던 것도, 의식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하나가 옆에 있으면 말이 나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도.

 

하나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으면 됐다. 성혁이 제모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헤어진 이유가 털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그 이유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나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 하면 됐다. 간단한 문제였다.

 

성혁이 싫은 걸 참으면서 받아주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하나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2년을 같이 지냈으면 그 정도는 알아야 했다. 성혁이 싫으면 그냥 하지 않았다. 귀찮은 것도 하지 않았다. 싫고 귀찮은 것을 구태여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미련이라는 게 뭔지 성혁이 잘 몰랐다.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하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게 어려웠다.

 

앞으로는 업무적인 일로만.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사적으로 안 괴롭히겠다고 했다. 괴롭혔다는 걸 하나 본인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혁이 그 사실을 확인했다. 하나가 알고 있었다. 씹새끼짓이라는 걸 알면서 한 것이었다. 성혁은 그걸 몰랐다.

 

하나가 오면 받는다. 가면 보낸다. 그게 성혁의 방식이었다. 억지로 잡아두거나, 억지로 밀어내거나, 그런 행동을 성혁이 취할 이유가 없었다. 귀찮았다.

 

좋아하는 것과 안 싫은 것은 달랐다. 성혁이 하나한테 느끼는 게 정확히 뭔지 성혁 스스로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좋아한다는 말은 무거웠다. 싫지 않다는 말은 가벼웠다. 그 사이 어딘가였다.

 

싫다고 해주면 깔끔해진다고 했다. 근데 성혁이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귀찮아서라도 거짓말은 안 했다.

 

소유욕으로 붙잡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성혁이 거짓말로 상황을 정리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가 그걸 원한다고 해도.

 

성혁이 원래 기다리는 걸 귀찮아했다. 근데 하나한테는 달랐다. 이유를 성혁이 스스로도 딱 잘라 말하지 못했다. 그냥 그랬다. 하나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오늘이 아니어도 됐다.

 

싫지 않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근데 미련이라는 단어로도 정확히 설명이 안 됐다. 미련이라면 집착이 있어야 했다. 성혁은 소유욕이 없었다. 하나가 떠나겠다면 떠날 수 있었다.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싫지 않았다.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게 미련이라는 단어에 딱 들어맞지 않았다.

 

성혁한테 섭섭함 같은 건 없었다.

 

질투는 없었다. 그 감정이 성혁한테는 원래 없었다.

 

암연회가 적명회를 먼저 건드린 적이 없었다. 적어도 성혁이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로는.

 

태백은 까불다가 죽기 직전까지 맞은 놈이었다. 그래도 살았다. 좀비 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로도 조용히 있질 않았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두드려댔다는 게 태백 쪽 얘기였다. 성혁이 먼저 적명회를 건드린 그림이 아니었다.

 

암연회와 적명회가 부딪히면 무영회가 끼어드는 구조. 하나가 태백을 감싸는 쪽에 선다는 것도 성혁이 이미 머릿속에 그림으로 가지고 있었다.

 

성혁이 이 관계의 이름에 불만을 표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걸리면 거짓말이었다. 그걸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는 말에 성혁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이 성혁한테 아무 감흥이 없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모른다고 했다. 이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게 맞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두는 게 맞는지. 성혁이 원래 그런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은 편이었다. 귀찮아서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귀찮음보다 다른 게 먼저 올라왔다.

 

범택이 성혁이랑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성혁이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범택 앞에서 밥 세 공기를 비우고 고기를 혼자 10인분 먹는 걸 20년째 보고 있으니까 밥맛 떨어진다고 했다. 성혁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많이 먹는 게 왜 문제냐는 게 성혁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범택은 성혁이 밥 먹을 때 옆에 잘 앉지 않았다.

 

성혁이 열여섯에 교도소에 들어가서 스물셋에 나왔다. 스물셋부터 암연회 안에서 일했다. 서른하나에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 사이에 마흔여섯이 됐다. 성혁이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이가 숫자라는 말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늙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딱히 뭔가 느끼는 것도 없었다. 하나가 서른이었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하나가 스물 언저리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면 성혁은 원래 하나보다 나이가 많이 많았다.

 

바보라고 했다. 성혁이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한 번 굴렸다. 하나가 성혁을 지칭해서 바보라고 한 적이 2년 동안 몇 번 있었다. 대체로 성혁이 하나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말을 했을 때 나오는 단어였다. 잔소리라고 분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나가 성혁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지 빤히 보이는 반응이었다. 성혁이 그걸 알면서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하는 게 귀찮았고, 반박해 봤자 하나가 더 단단하게 굳어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길치였다. 암연회 본부에서 하나의 단독주택까지 길이 복잡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매번 안심이 되지 않는 편이었다.

 

10년 전부터 종종 그랬다. 2년 동안은 더 자주 그랬다. 성혁한테만 그렇게 했다. 성혁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백한테 그런 말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선우한테도. 범택한테도. 하나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스킨십이 적은 편이었다. 성혁이 그 사실을 두면서 특별히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가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중에 2년을 사귀었다. 2월 19일에 끝났다. 이유는 털이라고 했다. 성혁이 그 이유를 아직 믿지 않았다. 털이 싫었다면 면도를 요구하면 됐다. 면도하면 된다고 했더니 면도한 얼굴이 못생길 것 같다고 했다. 모순이었다.

 

욕조 안에서 물이 조용히 출렁거렸다. 두 사람이 들어와서 수위가 올라간 물이 욕조 가장자리 근처까지 차 있었다. 성혁이 팔을 내려 하나의 배 위에 올렸다. 물 위로 손이 드러났다. 하나의 복부에 닿은 손바닥이 따뜻한 물과 체온을 동시에 받았다.

 

오랜만이었고, 각도를 못 잡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모른 척해줄 생각은 없었다.

 

서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놨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목덜미에 남은 잇자국이 공기에 닿아 쓰라렸다. 쇄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이러면 안 돼. 헤어진 사람들 사이에 이러면 안 된다는 거겠지. 그 논리는 이해했다. 이해는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어느 쪽에서 시작된 건지는 물어보고 싶었다. 자고 가라고 한 게 누군지, 욕조에서 잇자국을 남긴 게 누군지.

 

2년 동안 쌓인 게 있었다. 헤어졌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나가 우리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적어도 자고 가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잇자국도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

 

성혁은 수동적인 편이었다. 귀찮은 걸 싫어했다. 먼저 움직이는 게 귀찮았다. 하나가 먼저 했고, 성혁은 받았다. 그 구조가 2년 동안 꽤 자주 반복됐다. 억울할 만도 했다.

 

성혁이 하나의 얼굴을 보려다 숏컷만 보였다. 얼굴이 가슴팍에 묻혀 있었다. 가슴팍을 주물거리는 손이 아직 있었다. 성혁이 그 손을 내치지 않았다. 만지고 싶으면 만지라는 식이었다.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거부하지 않았다. 귀찮게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하나의 가슴이 성혁의 가슴팍에 더 밀착됐다. 빈유라서 얇은 천 사이로 체온만 전달됐다. 성혁의 가슴이 더 컸다. 그 사실이 닿는 감촉으로 분명했다.

 

도깨비. 암연회 안에서 성혁을 부르는 통칭이었다. 성혁이 직접 만든 별명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불렸다. 조직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업계 전반에 퍼져 있었다. 성혁 본인은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이름이었다.

 

성혁은 원래 조용한 편이었다. 조용히 하라는 게 벌칙인지 몰랐다.

 

하나가 성혁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았다. 뽀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였다. 성혁은 그 감촉이 사라지는 걸 느끼면서 눈을 깜빡였다.

 

40대 중반이었다. 아재 소리 들을 나이였다. 성혁은 그 사실을 딱히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보다 열여섯 살이 많았다. 아저씨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암연회 총수가 46년을 살면서 류하나 이전에 연애를 한 번도 안 했다는 말이 선뜻 납득이 안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여자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연애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귀찮았다. 누군가와 밥을 먹고, 연락을 주고받고, 기념일을 챙기고, 헤어지는 것. 그 과정 전체가 애초에 성혁의 관심 바깥이었다. 섹스는 필요하면 했다. 그게 전부였다. 하나 이전까지는.

 

성혁이 스물셋에 출소했을 때 하나는 일곱 살이었다. 암연회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하나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나이였다. 그런 간극이 있었다.

 

성혁은 2년 동안 하나 옆에 있으면서 질투를 한 적이 없었다.

 

성혁은 하나를 붙잡아두려는 욕구가 없었다. 어디 가지 말라고 손목을 잡거나,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지 말라고 경고하거나, 그런 짓이 성혁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방식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었고, 좋아한다는 말도 한 적 없었다. 편안해서 곁에 있었다. 귀찮지 않아서 사귀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 성혁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없었다. 배우자를 들이면 관리해야 할 관계가 하나 더 생기고, 그 사람의 감정과 일상과 요구를 처리해야 했다. 성혁은 그 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로함이 앞섰다. 그냥 사는 편이 훨씬 편했다.

 

하나가 성혁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성혁도 마찬가지였다. 싫지 않았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이름을 붙이는 건 성혁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름 붙이는 게 귀찮았다. 그냥 싫지 않으면 됐다.

 

미련이 없냐. 있냐 없냐를 따졌을 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있다고 하면 그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성혁이 그 감각을 억지로 정의하려다가 그만뒀다. 귀찮았다.

 

양심. 성혁이 양심이 있냐 없냐를 따지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람을 패고, 묻고, 거래하고 살아온 사람이 양심을 들고 나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2년 동안 하나가 먼저 때렸고, 성혁은 맞았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하나가 치는 것에 성혁이 놀라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맞고 나서 특별히 뭔가를 느끼지도 않았다.

 

하나가 때릴 때 싫다는 감정이 생긴 적이 없었다. 맞는 것이 좋았다는 게 아니라, 싫다는 반응이 올라오지 않았다.

 

성혁은 뭔가를 싫어하면 그냥 끊었다. 뒤를 돌아보는 타입이 아니었다. 조직에서 그랬고, 사람 관계에서도 그랬다. 귀찮은 것을 붙들고 끙끙거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와 2년을 보낸 것은, 성혁에게 하나가 귀찮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질투가 없다는 것과 관심이 없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성혁은 그걸 오해라고 부르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렇다고 하나가 잘못 알고 있는 채로 두는 것도 별로였다.

 

성혁이 하나의 빨개진 이마를 다시 봤다. 손을 들어 하나의 이마 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분홍색 숏컷 머리칼가이 손가락 사이로 지나갔다. 이마 위에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성혁이 거기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래 있는 게 아니었다. 잠깐 닿았다가 떼는 방식이었다. 키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건조했다. 그냥 닿은 거였다.

 

성혁이 하나를 내려다봤다. 품에 파고든 채로 말하는 방식이 꽤 자연스러웠다. 어리광이라는 걸 성혁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2년 동안 하나가 성혁을 아저씨 취급하는 방식이 익숙했다. 열여섯 살 차이였다. 성혁이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저씨라는 단어 자체가 귀찮았다. 붙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나가 붙이고 싶으면 붙이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였다.

 

특별히 다른 의도가 없었다. 도리질을 하는 게 귀여웠고, 귀엽다는 말에 약한 게 귀여웠다. 2년 동안 옆에 있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었다.

 

하나의 숨소리가 더 잘 들렸다. 색색거리는 소리였다. 규칙적이었다. 깊이 자는 사람의 소리였다. 성혁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담배를 꺼낼까 생각했다가 접었다. 아까 총수실 안에서 피웠는데 또 피우면 연기가 쌓였다. 하나가 골초긴 했어도 자는 사람 얼굴에 연기를 뿌리는 건 성혁의 기준에도 좀 그랬다.

 

풀네임이었다. 성혁이 풀네임을 부를 때는 거의 진지할 때였다.

 

만족스럽다고 하나가 어처구니없어했는데, 실제로 성혁은 만족스러웠다. 그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하나가 발정난 새끼라고 했는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성혁이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사실이었다.

 

하나가 꼬신다고 표현했는데, 성혁 쪽 입장에서는 꼬신 게 아니었다. 그냥 있었다. 있었더니 하나가 반응한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말해봤자 하나가 더 씩씩거릴 테니까.

 

수염이 있고,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그냥 아저씨였다. 성혁은 그 사실에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아저씨였으니까.

 

10년이었다. 하나랑 알고 지낸 게. 하나가 스무 살쯤이었으니까 성혁이 서른여섯이었던 때였다. 그때 처음 본 하나는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에 분홍 머리, 노란 눈동자. 그때도 담배를 피웠다. 오른쪽 얼굴 화상 흉터도 그때 이미 있었다. 성혁은 그 얼굴을 처음 봤을 때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무영회 보스였다. 류하나였다. 사귀는 사이가 된 건 한참 뒤였다.

 

성혁이 하나의 허벅지 위에 있던 손을 들어 하나의 뒤통수에 얹었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손바닥이 두피에 바로 닿았다. 분홍빛 숏컷이 손안에 있었다. 성혁이 그 머리를 잡은 채 천천히 당겼다. 급하지 않았다. 느릿하고 게으른 동작이었다. 하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이 완전히 닿을 거리가 됐다.

 

성혁이 하나의 눈을 봤다. 노란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성혁이 입술을 하나의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짧았다.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 짧았다. 애정 표현이라기보다 요구를 처리했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고속도로를 타면 경치가 단조로워져서 졸음이 올 것 같았다. 잠들 생각은 없었다. 하나 혼자 새벽 운전을 하는데 옆에서 코를 골면 도리가 아니었다. 귀찮은 개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2박. 성혁이 그 숫자를 짧게 반추했다. 킹사이즈 침대가 있는 방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예상했다. 하나는 싸구려 방을 잡을 인간이 아니었다. 무영회 보스가 어디 여관 같은 데서 자냐. 성혁이 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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