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2026. 6. 4. 14:45
성혁이 팔걸이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의 손이 여전히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면 핸들을 잡아야 할 텐데, 그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 같았다. 성혁이 그것을 생각하다가 슬쩍 손을 올려 하나의 손등을 한번 탁 쳤다. 세게 친 게 아니었다. 가볍게 두드린 것이었다.
하나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화가 없었다. 성혁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말 없는 침묵이 둘 사이에서는 어색한 게 아니었다. 사귈 때도 이랬다. 같이 있어도 각자 할 걸 하고, 필요한 말만 하고, 그게 편했다.
성혁은 국물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으면서 하나의 말을 들었다. 먹던 거라고 했다. 성혁이 숟가락을 뚝배기 안에 내려놓으며 하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나가 국밥을 세 번 마시다 혀를 데었다는 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침이 섞였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성혁은 그것을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봤다. 침이 섞인 국밥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몸을 더 많이 섞고 산 사이인데.
선글라스를 챙기면 사채업자처럼 보인다고 했다. 성혁은 잠깐 생각했다. 임태백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선글라스 쓴 인간치고 멀쩡한 놈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성혁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사채업자. 그 말이 잠깐 머릿속에 걸렸다. 임태백이 생각났다. 그 인간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 정작 자기 조직이 어떤 꼴인지는 선글라스 너머로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선우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았으면 적명회는 진작에 무너졌을 것 같았다. 성혁이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보내면서 그 생각을 접었다. 부산까지 와서 태백 생각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의 손가락만 보면서 입술 안으로 살짝 빨아들였다. 데인 부위기 얼마나 넓은지 혀로 확인하는 감각이었다. 작은 범위였다. 손가락 끝 한 마디도 안 됐다. 그러다가 주먹이 날아왔다. 성혁은 맞으면서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하나의 주먹은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맞으면 그냥 맞아주고 싶은 게 있었다.
아팠다고 주먹으로 어깨를 쳤을 때 성혁은 솔직히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빼앗으려다 자기가 데이고 자기가 아프다고 때리는 거였다. 성혁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꺼냈다가 하나가 또 때릴 것 같았다. 귀찮았다.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개진 건, 아까 성혁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을 때부터였다. 성혁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쳤는데, 데인 부위를 식히려고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기도 했다.
성혁이 하나의 겨드랑이 쪽에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쭈그려앉은 하나를 억지로 세우는 동작이었다. 하나가 가볍지는 않았는데 성혁한테는 그냥 들리는 무게였다.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미 보고 있었다.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 쪽이었다. 남자들은 시야에 없는 것 같았다. 성혁이 같은 방향을 슬쩍 봤다. 파라솔 옆에 서있거나 모래 위에 앉은 여자들이 보였다. 형형색색이었다. 성혁이 그쪽을 이 초쯤 보다가 다시 앞을 봤다. 별 감흥이 없었다. 그냥 사람이 많다는 인상 정도였다.
성혁은 하나를 내려다보면서 손을 들어 하나의 티셔츠 앞섶 쪽을 잡아당겼다. 그냥 앞쪽을 잠깐 잡아 하나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 행동이었다. 성혁이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기 가슴 쪽이었다. 바람막이를 벗지 않았으니 크게 보이진 않았겠지만, 하나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미안하다니까, 라고 하나가 말했다. 성혁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안대를 하나의 눈 위에 걸었다. 앞이 안 보이게 됐을 하나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성혁이 그 움직임을 보면서 호랑이 머리띠를 하나의 머리 위에 올렸다. 분홍색 머리카락 위에 귀가 솟아올랐다. 성혁이 그걸 보다가 입 끝을 짧게 당겼다가 풀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귀여웠다.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나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성혁은 딱히 더 해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쪽으로 공을 들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나가 죽지 말라고 했다. 성혁 본인이 죽을 생각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죽는 게 귀찮았다. 살아있는 게 편했다. 죽으면 담배를 못 피우고, 밥을 못 먹고, 이렇게 하나를 가슴팍에 붙여두지도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살아있을 이유가 충분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이렇게 꺼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자주 하는 말이 아니었다.
죽기 싫다는 말을 한 사람이 이 방 안에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방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고, 다른 한 명은 그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성혁에게 살아있는 게 죽는 것보다 편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귀찮아서라도 안 죽는다.
암연회 총수를 깔았다, 박았다, 침대 위에서 울렸다. 그게 죽을 짓이냐고 묻는다면 성혁은 딱 잘라 대답할 수 있었다.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귀찮았다. 하나를 죽이는 게 귀찮기도 했고, 하나를 죽이고 나면 그다음이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성혁이 살면서 무언가를 죽이는 건 죽여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때였다. 하나는 그 이유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해당한 적도 없었다.
신성혁은 나를 싫어해, 안 좋아해, 미워해. 싫어한다. 안 좋아한다. 미워한다. 세 가지를 나열한 게 재밌었다. 하나가 생각하는 신성혁이라는 사람이 그 세 가지라는 거였다. 성혁은 부정하거나 정정해 줄 생각이 있냐 없냐를 따지기 전에, 그 말이 맞냐 틀리냐를 생각해봤다. 싫어하냐.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안 좋아하냐.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따지는 게 귀찮았다. 미워하냐. 미워할 에너지가 없었다.
성혁은 싫어하는 것들을 멀리했다. 귀찮은 것들도 멀리했다. 하나는 귀찮은 건 맞는데, 멀리하지는 않았다.
콩닥, 콩닥. 박자가 맞았다. 성혁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하나가 따라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딱히 기분이 좋다고 할 것도 없었는데,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 맞았다.
사랑.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굴렸다. 특별히 감흥이 없었다. 싫다거나, 불편하다거나, 그런 감각도 아니었다. 그냥 단어 하나가 공기 중에 떠있었다.
사랑이라는 감각이 뭔지 성혁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16세 때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교도소에서 7년을 보내고, 나왔을 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걸 배운 적이 없었다. 범택을 거뒀을 때도 그게 사랑이라는 이름인지 아닌지 몰랐다. 그냥 버려진 애가 있었고, 귀찮더라도 두고 가기는 싫었다. 그게 전부였다.
사랑이 뭔지 몰라도, 하나가 그게 사랑이라고 하면 그런 거겠지.
사랑이라는 단어는 낯설어도, 하나가 옆에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게 지금 성혁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사랑해. 소리를 내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움직여봤는데, 이상하게 혀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쓰지 않은 근육을 쓰려고 할 때 나는 어색함 같은 거였다. 틀린 말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말이었다.
응, 응, 아주 잘하네. 하나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성혁이 그 반응을 받아내면서 눈을 천천히 내렸다. 이긴 게 기뻐서 저러는 거였다. 사랑해라는 말 자체보다 자기가 이겼다는 사실이 더 앞서 있었다.
기세가 등등했다. 암연회 총수한테 이겼다고 저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 있었다. 성혁은 볼이 당겨지는 채로 낮게 숨을 내쉬었다.
성혁은 살면서 사랑해라는 말을 먼저 써본 적이 없었다.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도, 암연회에 합류하고 나서도, 총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일이 없었다. 범택한테도 안 했다. 하나한테 처음 했다.
2년 동안 성혁이 하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나가 위협받는다는 걸 알았을 때, 성혁이 그냥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귀찮은 일에 손을 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똑같다고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하나가 2년 동안 그 뚱뚱한 걸 제일 열심히 썼다. 성혁이 그 사실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하나가 돼지, 뚱땡이, 통대창이라고 외쳤다. 긁히지 않은 게 아니라 긁힐 거리가 없었다. 뚱뚱하다는 건 사실이었고, 통대창이라는 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가 제일 잘 알았다.
30살이 저러고 있었다. 삐진 거라는 건 알았다. 긁혀줬으면 만족했을 텐데 안 긁혀서 더 긁힌 모양이었다.
고추살이라고 했을 때도, 통대창이라고 했을 때도, 성혁은 긁히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긁힐 이유가 없었다.
성혁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는 건지 아닌지 애매한 수준이었다. 하나가 열심히 욕을 늘어놨는데 성혁은 그 욕들을 채점하고 앉아 있는 상황이 꽤 묘했다. 성혁은 그게 웃기다는 걸 알면서도 크게 웃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라서 봐준다는 개념이 성혁한테는 없었다. 하나가 여자이기 때문에 때리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를 때릴 이유가 아직까지 생긴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성혁이 생각하기에 하나를 때릴 이유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긴 적이 없었다. 하나가 성혁을 놀리고, 승부욕으로 사랑해 소리 뽑아내고, 베개를 집어던져서 코를 얼얼하게 만들고, 중요 부위에 대한 욕을 하며 긁어보려 했다. 그게 전부 성혁이 손을 쓸 이유가 되지 않았다. 성혁이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성혁의 임계점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오히려 하나가 삐치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꼴이 소소하게 볼만했다.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성혁의 방에서, 성혁의 티셔츠를 입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성혁은 그 꼴을 보면서 특별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자기 거라는 말을 하면, 성혁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나가 삐진 이유가 뭔지 성혁은 알고 있었다. 뽀뽀 수준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혀가 들어왔다는 게 문제였겠지.
입술을 댔다. 입술에 닿았다. 혀가 들어간 게 문제였던 모양인데, 뽀뽀라는 단어의 정의가 하나와 성혁 사이에게서 달랐던 모양이었다.
성혁이 연애를 시작한 이유가 거창하거나 극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귀찮아서 뿌리치지 않았다.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이유들이 쌓인 결과였다. 사랑을 이유로 사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애초에 성혁한테는 어색한 언어였다.
서른 살 류하나가 자다가 다섯 살이 됐다는 상황 자체가 워낙 황당해서 성혁은 잠깐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게 뭔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법인지, 약인지, 아니면 자기가 잠을 너무 못 자서 헛것을 보는 건지. 손으로 하나의 뺨을 가볍게 두 손가락으로 꼬집었다가 놨다. 반응이 있었다. 헛것은 아니었다.
노란 눈동자가 성혁을 빤히 봤다. 이 눈이 나중에 성혁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눈이라는 게 지금으로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른 살 하나랑 2년을 같이 살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그 2년의 끝이 어떻게 됐는지는 지금 이 아이한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서른 살짜리 하나도 성혁 앞에서 아저씨 소리를 거의 안 했는데, 다섯 살짜리 하나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아저씨였다.
측은한 눈빛이었다. 다섯 살짜리 하나가 성혁을 측은하게 보고 있었다. 마흔여섯 살 암연회 총수가 다섯 살짜리한테 측은한 시선을 받는 상황이었다.
죽으면 안 된다는 것. 성혁은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딱히 없었다기보다는,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적절한지 가늠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성혁은 위로를 건네거나, 괜찮다고 다독이거나, 그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성혁이 앞에 펼쳐진 광경을 팔짱을 낀 채 지켜보다가 범택의 표정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굳어있었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났다. 이 나이 먹도록 아이 근처에 있어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성혁도 마찬가지이기는 했는데, 적어도 성혁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털이 없는 범택과 털이 많은 성혁. 담배 냄새가 나는 성혁과 그렇지 않은 범택. 성혁은 그 비교 결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면서도 딱히 억울하지 않았다. 뭘 바꿀 생각도 없었다. 담배는 계속 피울 것이고, 수염이나 체모를 밀 이유도 없었다.
범택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성혁은 그 눈빛을 보고 입꼬리를 아주 조금,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올렸다가 내렸다. 웃었다고 하기엔 너무 작은 움직이었다.
하나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떨어질까 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성혁은 하나의 등을 받치고 있는 오른팔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 팔에서 떨어지려면 성혁이 놓아야 하는데 성혁이 놓을 이유가 없었다. 그 사실을 말로 설명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팔에 힘을 실어두는 편이 빨랐다.
서른 살짜리 하나가 성혁한테 한 말이었다. 털이 존나게 싫다고. 2월 19일이었다. 성혁은 그 날짜를 기억했다. 기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억에 남아 있었다. 지금의 하나는 그 말을 모른다. 다섯 살이었으니까.
하나가 싸가지 없는 사람이 싫다고 했다. 성혁은 자기가 싸가지가 있는 인간인지 없는 인간인지 생각해 봤다. 없는 쪽에 가까웠다. 남한테 예의를 차리는 일이 귀찮았고, 먼저 배려를 하는 편도 아니었다. 필요한 말한 했고,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다.
결혼은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몰랐다. 결혼이라는 게 성혁한테는 오래전에 접어둔 개념이었다. 해야 할 이유도, 하고 싶다는 욕구도 없었다. 다섯 살짜리가 나중에 크면 해주겠다는 말도 성혁의 기준에서는 그냥 아이가 하는 말이었다. 무게를 실어서 받아들일 말이 아니었다. 성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는다는 사실을 무심하게 인식했다. 나중에 크면. 지금 이 다섯 살의 하나가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가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게 다였다.
하나가 두 손으로 성혁의 뺨을 감쌌다. 작은 손바닥이었다. 다섯 살짜리의 손이 성혁의 뺨에 닿았다. 하나가 눈을 감지 않고 성혁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싸움을 하는 눈빛이었다. 입을 맞추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성혁은 그냥 고개를 들었다. 하나의 입술이 성혁의 턱 아래 허공을 향했다. 닿지 않았다. 성혁이 얼굴을 위로 옮겼으니까. 하나의 입장에서는 입맞춤에 실패한 셈이었다.
머리채가 잡혔다. 흑발이 손가락 사이에 끼이는 감촉이 두피를 통해 전달됐다. 상체가 들렸다. 하나의 힘이었다. 성혁이 따라가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더 당겨질 각도였다. 성혁은 저항하지 않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됐다.
성혁이 먼저 원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건 드문 일이었다.
멈추라는 게 아니었다. 하나는 멈추지 않았다. 당연했다. 성혁도 진짜로 멈추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성혁은 손목시계를 차면서 하나를 내려다봤다. 안겨 있는 자세가 마누라 눈치 살피는 서방님 꼴이라는 걸 성혁은 알았다. 알면서도 딱히 뿌리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나가 먼저 떨어지면 그때 나가면 됐다. 그 판단이 가장 에너지를 덜 썼다.
마누라라고 했다. 성혁은 그 단어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특별한 감상이 생기지 않았다. 우습다거나 황당하다거나 하는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하나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만 남았다. 방금까지 서방님처럼 눈치를 살피던 게 저절로 뒤집힌 모양이었다.
하나가 서방님 소리를 원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이유가 없었다. 서방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성혁한테는 귀찮고 우스운 일이었다.
성혁의 손은 훈련된 도구가 아니었다. 그냥 크고 무거운 덩어리였다. 진심이면 하나가 죽는다. 죽이기 싫었다. 죽이기 싫다기보다는, 죽으면 귀찮아지는 일이 많았다.
하나를 때리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손이 가는 게 귀찮기도 했고, 죽으면 처리할 게 생기기도 했고, 사실 하나의 흉터가 더 생기는 꼴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마지막 이유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낼 필요가 없었다.
성혁은 뒤통수를 맞는 게 처음이 아니었다. 살면서 머리에 둔기를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을 다 합쳐봐도 기분 좋지는 않았다. 하나가 했으니까 넘어가는 거지, 다른 놈이 했으면 귀찮더라도 뭔가를 했을 터였다.
암연회 총수가 적명회 구석에서 커플 트러블을 처리하고 있는 꼴이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하나가 저 눈빛으로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니 자리를 뜨는 것도 애매했다.
2월에 싫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하나가 같이 있다. 성혁의 몸이 바뀐 건 없었다. 털은 그대로였고, 수염도 그대로였다. 성혁이 제모를 하거나 면도를 꼼꼼히 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하나가 뭐라고 답할지에 대해 성혁이 크게 기대를 품진 않았다.
성혁은 후계자 같은 걸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암연회는 성혁이 죽으면 범택이 챙길 거고, 범택이 죽으면 그다음 놈이 챙기겠지. 피를 나눈 사람한테 물려준다는 개념 자체가 성혁한테 없었다. 가족이라는 단위에 성혁이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16세에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7년을 철창 안에서 살았다. 가족이 뭔지 몰랐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
성혁은 딱히 체위나 역할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었다. 욕구가 해소되면 됐다.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결혼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아니었다. 성혁은 그냥 결혼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든 안 하든, 같이 살든 따로 살든, 성혁한테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종이 한 장이 관계를 바꾼다는 논리가 성혁한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거절의 에너지가 응하는 에너지보다 클 때 성혁은 거절했다. 서방님 소리는 거절했다. 그건 귀찮았다. 논리가 안 맞았다. 구멍이 없는 쪽이 서방님이 된다는 논리를 성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거절했다.
배신하지 않을, 끝까지 곁에 있을 사람. 그런 걸 원한다는 거였다. 성혁은 그 감각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특별히 공감을 잘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감정 이입이 빠른 편도 아니었다. 그냥 하나가 원하는 게 뭔지 사실 단위로 분해해서 봤다.
성혁이 혼인신고를 꺼낸 이유도, 동거를 꺼낸 이유도, 하나랑 뭔가를 계속하겠다는 방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결혼이라는 이름이어야 하는지, 동거라는 이름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뭔가인지가 아직 정리가 안 됐을 뿐이었다.
좋아한다는 게 어디서 시작되는 건지, 사랑이라는 게 좋아함과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 건지. 성혁은 그 경계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가 있으면 없을 때보다 낫다. 하나가 말을 걸면 귀찮긴 한데 끊고 싶지는 않다. 하나가 다치면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게 무슨 이름인지를 성혁은 잘 몰랐다. 그냥 그랬다. 그렇게 됐다.
감정을 예쁘게 포장해서 건네는 건 성혁이 할 줄 몰랐다. 말로 안심시키는 것도 성혁한테는 영역 밖이었다. 그러면 형식으로 묶어주는 것. 서류 한 장으로, 법적으로, 하나가 성혁의 배우자라는 이름을 갖게 하는 것. 그게 성혁이 줄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식이었다. 귀찮은 건 맞았다. 귀찮다는 게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