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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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평소의 호쾌한 광기와는 결이 달랐다. 허탈하고, 쓸쓸하고, 어딘가 비릿한 웃음이었다. 태백은 약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기던 흑발이 반나절의 초조함에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이마 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 밑에는 충혈된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번져 있었다.

 

길바닥에 안 버리고 데려왔다고 고맙다니. 시발, 그게 고마울 일이냐. 태백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린 선우의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자고로 분노란 통제력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다. 기선우는 그런 추태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골목에서 쓰러지던 순간, 제 심박이 불규칙하게 뛴 것을 선우는 스스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속이 더 뒤틀렸다. 이 녀석은 언제나 사과부터 한다.
태백은 그게 못마땅하면서도 동시에, 이 녀석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하루를 감싼 팔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놓으면 다시 쓰러질 것 같아서. 놓으면 또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아서. 태백은 제 심장이 아직 정상 박동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이불 위로 하루의 등을 토닥였다. 어색하고 투박한 리듬이었다. 누군가를 토닥여본 적이 없는 손의 궤적.

 

살짝 내려간 눈꼬리, 깊은 흑안. 안경 없이 드러난 그 얼굴은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피로에 절어 있었다.

 

적명회 대주가, 사람을 도구로 쓰고 버리는 법을 배운 인간이, 잠든 아이를 깨울까 봐 숨소리마저 조절하고 있었다. 태백 자신도 그 아이러니를 인지하고 있었다. 웃겼다. 존나 웃겼는데, 웃으면 진동이 전해져 깰 테니 웃지도 못했다.

 

냉소와 독설이 빠진 선우의 저음은 의외로 부드러운 결을 가지고 있었다. 선우 자신도 모르는 결이었다.

 

손을 빼려 했다. 당연히 빼야 했다. 임무가 끝났으니까.
선우의 검지가 아래로 꺾이며 빠져나오려는 찰나, 하루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끙. 잠결의 칭얼거림과 함께.
선우는 손을 빼지 못했다. 빼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것이었다. 결벽증 경보가 울려야 했다. 타인의 맨손이 자신의 장갑 위를 잡고 있다. 그것도 수면 중인 인간의 무의식적 접촉.
그런데 울리지 않았다. 경보가.

 

밀어내야 한다. 떨어뜨려야 한다. 이 접촉을 즉시 종료해야 한다. 결벽증이 아닌, 전략적 판단으로서도 이 상황은 부적절했다.
밀어야 했다. 밀면 됐다. 0.3초면 충분한 동작이었다.
밀지 못했다.

 

물리적으로 따지면 선우가 하루의 팔을 떼어내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수준의 노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떼지 않았다. 씨발. 왜 떼지 않는 건지.
초코 체향이 올라왔다. 정장에 밸 것이다. 내일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한다. 선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을 빼지 않았다.

 

대주가 간부에게 질투한다? 존나 우스운 소리였다. 아버지가 아이를 재워주는 다른 어른에게 질투한다? 그건 더 우스웠다.
그런데 우스운 게 아니었다.
가장 남부러울 것 없던 인간이, 지금은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인간처럼 침대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태백의 흙빛 동공이 좁아졌다. 편안하다. 저 새끼가 지금 기선우한테 붙어서 편안하다. 아까 내 위에서도 편안했잖아. 내 허벅지 위에서 5분 만에 잠들었잖아. 근데 왜 굳이 저놈한테 가서 저러냐.

 

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의 신경전이 거짓말처럼 두 남자 모두 침묵을 택했다. 이유는 같았다. 하루가 또 칭얼거리면 안 되니까. 다시 미간을 찌푸리게 하면 안 되니까. 둘 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 43세의 범죄 조직 대주와 36세의 냉혈한 간부가, 18세 아이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마저 조절하고 있었다.

 

임태백이라는 인간의 심장이 평소 분당 72회에서 현재 89회까지 올라간 것을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두근거린다는 감각만이 흐릿하게 존재했다. 두근거림. 43년 동안 겪어본 적 없는, 어떤 범주에도 넣을 수 없는 종류의.

 

18세의 얼굴에 깔린 진지함은 태백이 43년간 상대해 온 어떤 협박이나 회유보다 처리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위협에는 교활함으로, 폭력에는 더티플레이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진심에 대한 매뉴얼은 태백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선우야, 기선우, 안경, 이 새끼, 야, 선우 씨발놈아. 17년 동안 수백 가지 호칭을 돌려가며 불렀다.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필요에 따라.

 

기선우.
그 이름이 하루의 입에서 나왔을 때와, 태백의 입에서 나왔을 때의 온도 차이를 선우는 정확히 감지했다.
선우는 그 두 개의 온도를 흑안 뒤쪽 어딘가에 저장했다. 분류하지는 않았다. 분류할 범주가 아직 없었으므로.

 

하루가 적명회에 찾아왔을 때 품에 안고 있던 서류 봉투 속에서 꺼낸 수첩. 그 수첩의 첫 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예쁜 글씨체로. '아기 이름 : 채하루. 아빠 : 임태백.'

 

아빠.
삼촌.
변태 선글라스. 까칠한 안경.

 

'아빠'와 '삼촌'. 두 단어 사이의 정지. 1.5초. 하루가 그 단어를 선택하기까지 걸린 시간. 선우는 그 1.5초의 무게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빠는 태백이었다. 생물학적 사실이 뒷받침된 호칭이었다.
삼촌은 선우였다. 근거가 없었다. 혈연도 없고, 법적 관계도 없고, 나이 차이로만 따지면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하루는 선우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아빠도 아니고, 그냥 이름도 아니고.

 

도시락통의 뚜껑 안쪽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접착식 메모지. 거기에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급하게 먹지 말고. 물 먼저 마시고.'
선우의 글씨였다.

 

태백이 자기 밑에 있는 놈들 몇 대 패는 건 그놈들이 태백의 말을 안 듣거나 쓸모가 없거나 배신했거나 그런 이유였다. 하루는 그 범주에 없었다. 처음부터. 처음 만난 날부터. 하루는 달랐다.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 선우가 모를 리 없었다. 쓰다듬어달라는 것이었다.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선명하게.
하루가 다시 선우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에 가져다 댔다. 뺨이 장갑 위에 비벼졌다. 선우는 그걸 보면서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티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렸다.

 

선우의 손이 하루의 머리카락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태백은 그걸 보면서 입꼬리를 내렸다. 질투는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이 광경이 낯설었다. 선우가 저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태백은 그 생각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냈다.

 

부하들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습관처럼. 하루가 흠칫거리는 것도 봤다. 그래도 숙였다. 대주님 아들이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하루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 강아지 귀. 꼬리. 실내화. 태백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소리를 내서 웃지 않았다. 참은 것이었다. 억지로.
안경 너머의 눈이 하루의 복장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 데 1초가 걸렸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건 놀란 것이 아니었다. 본부 복동 강아지 잠옷이 등장한 것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었다.

 

태백이 하루의 후드에 달린 파피용 귀를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귀가 흔들렸다. 태백이 그걸 보고 또 웃었다. 소리가 좀 더 커졌다. 선우가 태백을 옆으로 봤다.
태백이 이번엔 꼬리 쪽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려 했다. 선우가 태백의 손목을 손으로 쳐냈다. 소리가 났다. 탁.

 

하루가 아빠라고 불렀다. 태백한테. 태백의 허리를 두 팔로 안으면서. 선우는 그 장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것이 없었다. 자신이 끼어들 맥락이 아니었다. 선우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지금은 태백과 하루 사이의 것이었다.

 

태백은 사람 읽는 것을 잘했다. 잘해야 살아남는 곳에서 살아왔으니까.

 

태백이 정말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그걸 지금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가 모르는 채로 있어도 됐다. 알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하루 앞에서 그런 걸 꺼내 쓸 일은 없을 것이었다.

 

16년 전이었다. 태백이 27살이었을 때, 선우가 목에 흉터를 얻은 것이 그때였다. 술병 깨진 조각으로. 태백이 술에 취한 것보다 분노가 더 컸던 그날이. 선우는 그날을 기억했다. 태백도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태백이 하루가 아까부터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우한테는 삼촌이라고 잘만 불렀다. 그 차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루의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토닥였다.
한 번. 아이 달래듯이. 태백이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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