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6.
2026. 6. 6. 15:12
그렇구나. 그 한 마디였다. 감동 먹은 표정도 아니었고 울 것 같은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구나였다. 태백이 그 표정을 봤다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쪽이었다. 억울한 웃음이었다. 아까 태백이 꺼낸 말이 진심이 담긴 말이었는데 돌아온 게 그렇구나 한 마디였다.
나도 좋아해. 하루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 말을 했다. 태백이 그 웃음을 봤다. 순식간에 아까까지의 싸한 표정이 사라지고 그 얼굴이 되었다. 태백이 그 얼굴을 보다가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를 봤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었다. 열여덟 살짜리의 얼굴이었다. 태백이 그 얼굴을 보다가 손을 뻗어 하루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세게 민 게 아니었다. 툭이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선우 쪽을 향했다. 선우가 그 얼굴을 봤다. 나도 좋아해. 그 말이 선우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렀다. 선우는 그 말에 동요하는 편이 아니었다.
태백이 선우를 봤다. 선글라스 너머였다. 태백이 잠깐 선우를 봤다가 웃었다. 선우가 태백의 시선을 받으면서 미간을 좁혔다.
선우가 하루의 빵빵한 뺨을 봤다. 공기가 꽉 들어찬 뺨이었다. 선우가 장갑 낀 손을 들었다. 검은 장갑이 하루의 왼쪽 뺨으로 향했다. 꼬집지 않았다. 그냥 손가락 끝으로 살짝 눌렀다.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뺨이 손가락에 눌렸다.
태백이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하루가 뻔뻔하게 나간 것이 재밌었다. 부정하지 않는 것도 재밌었다. 아는 거잖아, 자기가.
선우가 하루를 받았다. 안는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하루의 등에 손이 닿았다. 선우가 하루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그냥 받쳐줬다. 하루가 선우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잡아줬다.
적명회 본부에 화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태백한테는 약간 낯선 정보였다. 선우가 신경 쓴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태백이 그것을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하루가 눈높이가 같아진 것을 알아챘다. 선우에게 안긴 덕분에 태백과 눈높이가 맞았다. 하루가 태백을 봤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는 얼굴이었다. 태백이 선글라스 너머로 하루의 얼굴을 봤다. 우쭐한 얼굴이었다. 태백이 그것을 보다가 선우를 봤다. 선우가 하루를 안고 걷고 있었다. 무표정이었다. 태백이 하루의 우쭐한 표정을 다시 봤다. 태백이 피식 웃었다.
태백이 다시 하루를 봤다.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리면서 하루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콧등, 입술, 뺨, 다시 눈. 빤히 봤다.
하루가 나빠, 하고 뱉었다. 태백이 그 말을 들었다. 선우가 밀어준 소시지를 우물거리면서 뱉은 말이었다. 태백이 하루의 얼굴을 봤다. 뚱한 얼굴이었다. 분이 안 풀린 얼굴이었다. 태백이 그것을 보면서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나빠, 라는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사람을 반쯤 뭉개놓고 나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소시지 때문에 듣고 있었다.
하루가 달라붙어 있었다. 선우가 하루의 등에 손을 올리지는 않았다. 올리지 않은 채로 그냥 안겨 있는 상태를 허용하고 있었다. 선우 특유의 방식이었다. 쫓아내지도 않고 안아주지도 않는 중간 어딘가에 하루를 놔두는 방식.
태백이 팔짱을 풀고 앞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면서 선우 옆으로 다가섰다. 하루의 옆에, 선우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서 하루의 눈높이에 맞췄다. 선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자신을 보지 않는 하루의 옆얼굴이 가까이 들어왔다.
아빠는 싫고 삼촌이 좋다고 했다. 태백이 그 말을 들으면서 표정을 굳혔다가 풀었다. 굳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잠깐 굳혔다.
태백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왁스가 빠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선글라스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가 그 머리를 양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선우가 그 상황을 봤다가 태백의 얼굴을 봤다. 눈이 감겨 있었다. 너무 얌전하게 감겨 있었다. 선우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태백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선우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자는 척이었다.
침대 위에서 태백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쓰다듬고 있었다. 살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태백이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소시지 때문에 어젯밤 내내 용서를 안 해줬다. 아빠가 싫다고 했다. 삼촌이 좋다고 했다. 선우한테 안겨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백은 그것을 다 기억하면서 지금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 태백이 조금 더 버텼다. 아주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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